[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일본 정부가 지난 7월부터 한국을 대상으로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수출 규제에 나선 가운데, 20일 포토레지스트를 대상으로 특별 포괄대상으로 전환한다고 전격 발표해 눈길을 끈다.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 직전에 나온 방향성이라 특히 시선을 집중시키는 중이다.

재계에서는 ‘악화된 한일관계가 변곡점을 맞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청와대도 “이번 조처는 일본 정부가 자발적으로 한 것으로, 일부 진전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전격적 판단

일본은 지난 7월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초강수를 통해 한일 경제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징용공 논란 등에 있어 한국과의 마찰이 커지는 가운데, 한국을 ‘믿을 수 없는 나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기존 포괄규제를 받던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핵심 3대 소재를 개별허가로 돌려, 사실상 수출 공급 라인을 통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반도체 코리아, 디스플레이 코리아의 아킬레스건을 노린 셈이다.

세코 히로시케 일본 경제산업상은 “한국과는 신뢰할 수 없다”면서 “신뢰하며 대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한국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한국에 대한 경제제재가 자유무역주의 부정과는 관련이 없으며, 단지 한국을 믿을 수 없으니 안보상의 이유로 경제제재에 나선다는 뜻이다. 

한국은 즉각 반격했다. 일본을 대상으로 역시 화이트리스트 배제에 나서는 한편,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통해 "경제 보복은 그 자체로도 부당할 뿐 아니라 그 시작이 과거사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며 "정부는 일본의 경제 보복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우리 경제를 더욱 내실 있게 발전시키기 위한 전략을 정교하고 세밀하게 추진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로는 난타전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국내 주요 CEO들이 연이어 일본으로 날아가 현지 파트너를 점검했고, 주요 기업에는 '경고등'이 들어왔다. 사실상 미국이 한일 경제전쟁에서 발을 뺀 가운데 한국 정부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를 시사하자 사태는 더욱 악화됐다. 최근까지 두 나라는 WTO에서 충돌하며 한치의 물러남도 없었다.

악화일로를 걷던 두 나라의 관계는 8월 15일 광복절을 기점으로 더욱 요동쳤다.

문재인 대통령은 8월 15일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제74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연설을 통해 책임있는 경제 강국의 길로 나아가는 한편,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우리는 세계 6대 제조강국, 세계 6대 수출강국의 당당한 경제력을 갖추게 되었다. 국민소득 3만 불 시대를 열었고, 김구 선생이 소원했던 문화국가의 꿈도 이뤄가고 있다"면서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도록 다짐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조건부 지소미아 종료 유예를 선언하며 일부 전향적인 태세를 보였고, 미국도 지소미아 정국을 기점으로 두 나라의 충돌에 개입하며 사태는 진정세에 접어들었다. 

여기에 일본제품 불매운동으로 일본의 소재 및 자동차, 관광사업이 줄줄이 타격을 입자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실제로 15일 정부 발표에 따르면 지난 7월부터 10월까지 일본의 대 한국 수출은 약 150억1000만달러를 기록해 전년 동기보다 무려 14% 떨어졌으나, 한국의 대 일본 수출은 94억8000만달러로 7% 줄어드는 것에 그쳤다.

한국 기업들이 소재 국산화를 성공시키는 한편 일본의 경제전쟁에 큰 타격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소재 독립에 성공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실제로 업계에서는 일본의 조치로 한국 반도체 업계의 피해는 미비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일부 국산화 로드맵이 등장하는 한편, 자국의 수출 규제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본 기업들이 속속 한국에 공동 사업장을 설립하려는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불확실성이 크다는 점은 악재지만 당장의 피해는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일본의 공격은 오히려 한국 반도체 업계가 튼튼하다는 점을 증명해준 셈이 됐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수출길을 간헐적으로 열어준 바 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지난 8월 포토레지스트, 고순도 불화수소인 에칭가스 수출을 허가했으며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는 9월, 액체 불화수소인 불산액은 WTO 2차 양자협의 직전 수출 규제를 풀었다.

이후 한국 정부가 지소미아 종료 유예를 선언하며 일종의 출구전략을 마련한 상태에서, 한일 경제전쟁이 두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두 나라의 협상 가능성이 높아진 이유다. 여기서 한일 통상당국의 최근 만남이 눈길을 끈다.

한일 통상당국은 16일 오전 일본 도쿄에 위치한 경제산업성에서 ‘수출규제 해결을 위한 통상담당 국장급 대화(제7차 수출관리정책대화)’를 진행했으며, 협상의 결과물은 도출되지 않았으나 일본측이 일부 전향적인 자세로 한국 대표단을 맞이하는 장면이 눈길을 끌었다. 지난 협상에서는 일본 대표단은 제대로 된 협상장도 아닌 일반 회의실에서 인사도 없이 한국 대표단을 맞이했으나 이번에는 일본 대표단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국 대표단을 맞이했고, 협상장도 정식 회의실로 잡았으며 간단한 다과까지 마련하는 정성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일본의 이러한 태세 전환은 지소미아 종료 유예를 명분으로 삼아 한국과의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의지며, 그 이면에는 자국의 어려운 경제 상황을 타개하려는 포석이 깔렸다는 분석이 나왔다.

여기에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의 만남을 앞두고, 일본이 포토레지스트를 특별 포괄대상으로 발표한 셈이다.

분위기 좋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8차 한중일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23일 중국 방문길에 오르는 가운데,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연쇄 정상회담을 열고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할 계획이다.

문 대통령과 시 주석의 만남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정국 이후를 고민하는 쪽에 집중될 전망이다. 북핵 문제를 두고 중국과 내밀한 의견교환을 하는 한편, 2016년 주한미군 사드 배치 이후로 불거진 두 나라의 갈등을 해소하는 쪽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한령(限韩令)이 주된 이슈로 부각될 전망이다. 사드 논란 후 중국의 한한령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이번 문 대통령의 중국 방문으로 나름의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아베 총리와도 만난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최근의 경제전쟁을 두고 합의점을 타진할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은 지지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한일 정상회담을 두고 "정상 간 거리낌 없이 의견을 교환하는 것은 한일 관계에 있어 극히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분석이 나오는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포토레지스트에 대한 특별 포괄허가를 결정하자, 일각에서는 ‘한일 경제전쟁도 끝이 보인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최근 미중 무역전쟁도 그 포성이 잦아드는 가운데, 글로벌 경제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유다.

다만 일본의 포토레지스트 특별 포괄허가 하나로만 한일 경제전쟁의 종전을 예언하기에는 성급하다는 지적도 있다. 양국의 관계가 벼랑끝으로 몰렸기 때문에 극적인 반등은 요원하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스가 요시히데 장관은 지지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한일 두 정상이 전향적인 자세로 협상할 것이라는 말을 함과 동시에 강제징용 문제 해결을 위한 기금 법안에 대해 "정부 방침은 명쾌하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이 전부"라고 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