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變質 72-D, 1972

최명영 작품과 화답(和答)하기 위해서는 사유(思惟)를 돕는 마음의 눈 즉 정신활동(精神活動)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그것은 굳이 논리적이며 합리적인 사고의 전개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무심(無心)한 가운데 가장 정적(靜的)인 순간에 직관(直觀)되는 느낌으로써 족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거기엔 구체적인 내용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우리가 놓치고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그의 방법적 서술은 더욱 명료해질 것이다. 물감을 틀(캔버스)의 한계선 밖으로 밀어낼 때 도구(로울러)의 힘이 미치지 않기 시작하는, 이른바 틀과 틀을 감싸는 외부공간(外部空間)과의 접점(接點)에 나타나는 질료의 표정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의 틀 위에 놓이는 구조물(構造物)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느껴지는 그의 작품 ‘평면조건’을 자연화(自然化)시키는 열쇠가 되기도 하는, 이 부분은 생명체의 생성부분(生成部分)과도 같다. 생명이 움트는 부분으로서, 우주공간에 진입하는 통과문(通過門)의 구실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이 있음으로써 회화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부분이 겹쳐지면서 더욱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냄과 동시에 캔버스라는 이미지는 틀 자체와 함께 「질료의 무덤」속에 침잠(沈潛)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남는 것은 생경한 느낌의 화학물질이 아닌, 온전한 구조물(構造物)이라는 또 다른 세계이다.

캔버스(틀)의 실체(實體)를 의문(疑問))하다 의사평면(擬似平面)을 만들고, 마침내 의사평면이라는 가정(假定)마저 떨쳐버리고 정신적인 프로세스(prosess)를 강조하는 이상(異常)한 존재로 변모(變貌)한다. 여기서 이상(異常)한 존재라 함은 낯선 것이며 새로운 것을 의미한다.

예측하지 못한 미지(未地)의 몸짓들인 이 물감의 혼적은 곧바로 구조물을 감싸고 있는 우주공간과의 호흡대(呼吸帶)가 됨으로서 지구(地球)와 동일(同一)한 대지의 개념이 성립된다. 반복적인 도포작업(塗布作業)은 어쩌면 시간 쌓기(時間層)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시간 쌓기라 함은 오랜 세월동안 흙, 먼지, 돌 등이 바람과 물 등 물리적인 힘에 의하여 운반되어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지층(地層)의 다른 표현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최명영(CHOI MYOUNG YOUNG, 최명영 화백, 최명영 작가)의 작업은 인위(人爲)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어 자연현상과는 구별되고 있지만, 물질개념이 아닌 정신개념으로 볼 경우 행위의 반복에서 나타나는 무위성(無爲性)의 혼적, 즉 ‘구조물을 감싸고 있는 우주공간과의 호흡대’에서 인위가 사라짐을 볼 수 있다.

이 때 나타나는 현상, 즉 인위(人爲)의 사라짐은 곧바로 무위(無爲)의 다른 말이 되므로 자연현상화(自然現象化)로 직결된다. 따라서 되풀이되는 도포작업은 질료(質料)라는 물질을 쌓는 작업이면서 결국은 사상(思想)의 쌓임으로 환치(換置)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투명성(透明性)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물질을 물질로 보지 않을 때 열리는 세계는 그대로 환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세계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외형적으로야 겹쌓이는 시간의 혼적인 도포작업이 작품의 지층(地層)으로 형성(形成)되어 새로운 땅(大地)을 실현(實現)케 된다.

△신항섭, 미술평론가(現代美術의 位相, 화성문화사刊,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