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變質 70-13, 1970

최명영 연작 ‘평면조건’을 보면 기존 회화의 방식으로는 얻을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얻고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절망감 혹은 적막」과 같은 분위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분위기는 작품의 진실을 가리는 하나의 안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은 채 그냥 쳐다보는 것으로써 작품 스스로 공감(共感)의 돌파구를 열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몇 번의 만남 후에는 문득 투명(透明)한 세계(世界)가 열리게 된다. 사방이 가로막힌 벽에 갇힌 듯 한 부자유속에서 고개를 쳐들어 문득 하늘을 발견했을 때와 같은 사고(思考)의 개안(開眼)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아무런 이미지가 없기에 더욱 뚜렷한 심상(心象)을 찾아볼 수 있다는 비논리성이 바로 작품의 골격이자 방법적인 비밀이다. 캔버스라는 주어진 틀(장방형, 정사각, 직사각) 위에 울트라마린, 마블오렌지, 블랙 혹은 붉은 색 따위의 물감을 놓고 나이프, 붓, 로울러 등으로 균질 (均質)하게 화면을 덮어가면서 화폭이라는 한계선(限界線) 밖으로 밀어내는 행위가 작업의 전부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같은 행위가 한번 으로 끝나지 않고 10여 차례 이상이나 반복(反復)해서 이루어진다는 데에 있다. 이 때 최명영에 의해 선택된 물감은 다만 질료(質料)로서 존재할 뿐 이미지의 구축(構築)에는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한다. 캔버스를 덮어버리는 질료로서의 물감은 색깔이라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喪失)한 채 전혀 생소한 물질성(物質性)만을 확인시킬 따름이다.

캔버스 자체를 덮어버리는 작업과정에서 일정한 한 가지 색(色)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어느 경우엔 색 층(色 層)을 형성했다고 할 만큼 색깔의 선택이 자유롭다. 이처럼 색깔의 선택이 자유롭다는 사실은 색깔을 색깔로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보다 분명한 작의(作意)가 노출(露出)됨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여러 기본적인 조건위에서 제작되는 최명영(CHOI MYOUNG YOUNG, 최명영 화백, 최명영 작가) ‘평면조건’은 외형상으로야 더 이상 찾을 것이 없다. 숙련된 행위에 의해 매끄럽게(均質)하게 다듬어진 작품의 표면과 그 밑에 가 리워진 똑같은 10여개의 표면들이 상상(想像)되는 것으로써 작업과정과 작품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마음의 투사(透射)가 가능한 데서 작품의 투명성(透明性)이 비롯된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의 작업에 있어서는 단조롭고 일정한 리듬으로 유지(維持)되는 작업과정에서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 훨씬 설득력 있는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짐짓 일부러 무엇인가를 꾸미려하지 않는 행위(行爲)의 무상성(無常性)에 근거(根據)하고 있는 이 투명함이야 말로 수정체(水晶體)와 같은 심도(深度)를 지니고 있다 할 것이다.

매끄러운 표면은 미세한 질료(물감)의 응집체(凝集体)로서 가까이서 보면 물감과 도구(붓, 로울러, 나이프 따위)의 성격에 따른 표정의 다양함이 눈에 띈다. 하지만 육안(肉眼)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을 때 질료와 도구에 의해 생긴 표정은 사라지고 단순표면(單純表面)만 인지(認知)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질료(質料)가 물질적(物質的)인 한계에서 벗어나 정신구조화(情神構造化) 되었음을 뜻한다. 똑같은 행위(作業)를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물성(物性)이 제거(除去)되는 것이다. 또한 물성이 제거됨으로써 물질을 물질로 파악하려는 우리의 시도는 끝내 허황한 것이 되고 만다. △신항섭, 미술평론가(現代美術의 位相, 화성문화사刊,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