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현대 미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흔히 과거의 전통을 완전히 깨트리고 이제까지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을 하려는 새로운 미술의 종류로 생각한다. 하지만 현대(現代)는 더욱더 복잡해졌으며 현대 미술(contemporary art)도 과거의 미술과 마찬가지로 한 시대의 특정한 문제에 대한 반응으로 존재한다.

20세기 무렵, 자연 앞에 앉아서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야 한다’는 단순한 요구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미술은 나아갈 방향을 잃어버렸다. 미술가들은 실험하기 시작했고, 좋든 싫든 창안자가 되어 새로운 ‘주의(主義, ism)’를 내세우면서 참신한 미술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주목을 받기 위해 과거 대가들의 감탄스러운 솜씨보다는 독창성을 추구해야 했다.

대표적으로 스위스의 화가이자 음악가인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는 선과 명암, 색을 서로 결합하여 어떤 부분은 강조하고, 생략함으로써 미술가가 추구하는 감각으로 점차 형상을 드러내어, 보는 사람이 상상하도록 암시해주는 그림을 그렸다. 이것이 아무 생각 없이 모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연에 충실하다’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선사 시대의 벽화에서 볼 수 있는 기이한 생물(동식물) 등의 형태들은 사실 예술가들이 창조한 것이다. 정신 속 창작에 대한 신비로운 힘을 표현해낸 것이다. 클레는 이러한 창조적인 힘이 계속 정신 속에서 잘 자라나갈 수 있도록 자유로이 유희하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과거의 미술가들 역시 영감을 즐겼다. 하지만 그들은 항상 자제했고, 구도나 정확한 것에 집중했다. 클레뿐만 아니라 창조적인 자연, 미술가의 힘에 대한 믿음을 지닌 많은 현대 미술가들은 창조적 의식의 흐름을 자제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주장대로 ‘낙서’를 생각해보자. 보통은 제멋대로 무심코 장난한 결과로 그치지만, 미술가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장난이 장난으로 그치지 않고 심각한 의문과 제안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낙서가 미술작품이 되지는 않는다. 형태에 대한 유희를 파울 클레처럼 얼마나 환상적인 경지로까지 이끌어 갈 수 있으냐 하는 것이 미술가 개인의 기질과 취향에 좌우되는 문제이고 또 사실상 그래왔다.

그림을 못 그리는 것이 아니라 못 그리는 것처럼 서툴게 그리는 화가들, 20세기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오세열, 무제, 2019, 캔버스에 유채, 130x160cm

© 학고재 Hakgojae, 오세열 OH Se-Yeol (사진=학고재 제공)

무구(無垢)한 눈: 오세열(吳世烈, OH Se-Yeol, b.1945)

오세열은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그림 그리는 것을 즐거워했다. 중학교 때부터는 미술부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1969년 서라벌예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1974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서라벌예술대학 재학 시절부터 매년 국전(1949년부터 1981년까지 신진작가들의 등용문이었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약칭)에 출품하여 5차례의 특선과 9차례의 입선을 했다. 1967년 결성된 ‘구상전(具象展)’과 1981년 ‘제작전(制作展)’ 등을 중심으로 추상에 맞서 자연주의적 회화를 모색하고자 활동을 이어갔다. 1972년 서진수와 함께 개최한 ‘서양화 2인전’을 시작으로, 수차례의 개인전도 가졌다. 1971년  ‘구상전(具象展)’에서 금상을, 1976년 한국일보가 주최하는 ‘한국미술대상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오세열은 20~30대 젊은 시절에 누구보다 적극적이고 성실한 자세로 화가로서의 이력을 성실히 쌓아나갔다.

오세열, 무제, 1967, 혼합매체, 61x51cm

© 학고재 Hakgojae, 오세열 OH Se-Yeol (사진=학고재 제공)

오세열이 화단에 활동을 시작했던 1970년대는 일제 침략으로 훼손된 문화 정체성이 회복되기도 전에 급격하게 유입된 서구 문명에 의해 혼란을 겪던 과도기이자 동시에 성장기였다. 일부 작가들의 활발한 국제전 참가와 국외 거주 작가들의 교류를 통해 서구 미술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었다. 국내로 유입된 미국, 일본 미술잡지 등을 통해 서구 미술을 접할 수 있게 되면서 당시 하드에지(Hard Edge), 옵아트(Optical Art), 색면추상, 네오다다(Neodadaism), 팝아트(Pop Art), 행위미술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제 조류를 동시대에 수용하고 실험할 수 있었다. 서구에서 상대적으로 긴 기간 동안 전개되어온 다양한 미술 경향을 짧은 기간 내에 압축하여 경험한 것은 국제 미술사조에 뒤처져있던 한국미술계 발전에 원동력이 되었고, 한국 현대미술의 독자적 정체성과 국제화의 열망을 키우게 되는 계기였던 시대였다.

이러한 화단의 분위기에서 오세열은 재현적 구상에서 벗어나 오랜 세월을 거쳐 퇴색한 벽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짙은 암청색과 암갈색이 주를 이루는 ‘반(半) 추상’에 가까운 작업을 선보였다.

오세열, 무제, 1972, 혼합매체, 113x113cm

© 학고재 Hakgojae, 오세열 OH Se-Yeol (사진=학고재 제공)

“문명의 급속한 발달로 인한 인간의 불행한 모습을 표현해보려 했습니다. 너무 물질적인 것에만 매달리다 보니 정신적인 게 소멸해가는 현실이 안타까웠기 때문이지요.” –오세열

오세열의 인물은 1980년대부터 서서히 윤곽을 드러낸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6월 민주항쟁 등 암울했던 시대상과 자연스럽게 겹쳐 가공되지 않은 거친 표현과 강한 무거운 회색이나 차가운 푸른색으로 감성을 표출했던 시기이다. 인물의 팔과 다리는 몸통에 달싹 붙어있거나, 떨어져 나가거나, 양팔의 길이가 각기 다르다. 머리는 몸에 비해 너무 크다. 눈, 코, 입, 귀는 생략되거나 하나밖에 없다. 이같이 신체 부위들이 따로따로 놀고 있는 온전하지 못한 자태는 한국 현대사회의 불행한 인간상을 대변한다.

오세열, 무제, 1987, 혼합매체, 75.5x50cm

© 학고재 Hakgojae, 오세열 OH Se-Yeol (사진=학고재 제공)

1990년대 이르러 여전히 불완전한 인물의 신체는 그대로지만, 형태와 터치가 간결해지고, 화폭의 느낌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화면 가득 단독 주인공으로 부각시킨 인물 표현과 단순화된 배경처리, 화려한 색채가 등장한다. 멀뚱한 눈, 멍한 듯 표정 없는 얼굴, 기술적으로는 미숙한 듯 보이지만 틀에 얽매이지 않는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오세열은 선입견을 배제하고, 무구한 눈으로 마음 그대로의 조형미가 독창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오세열, 무제, 1992, 혼합매체, 72.7x90cm

© 학고재 Hakgojae, 오세열 OH Se-Yeol (사진=학고재 제공)

“제 작품은 동심의 세계를 표현한 것입니다. 저는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기름을 빼서 무명옷, 광목과 같은 우리 민족성, 한국인의 정신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중략) 제 그림은 목적이 없어요. 어떤 그림을 어떻게 그려서 사람들에게 전달하겠다고 하는 것보다, 내 무의식, 내 자아, 내 마음속에 무언가 뿌리박힌 것, 그런 것을 찾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찾고 있어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움, 무의식 중에 나오는 것을 표현하기 좋은 게 드로잉이라고 생각해요.” –오세열

오세열의 유화는 조금 특별하다. 유화로 그려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름을 완전히 제거했기 때문에 광택이 없다. 거기에 칼이나 송곳과 같은 도구를 사용해 의도적으로 긋고, 긁고, 갈아내는 행위를 반복해 훼손했다. 작가만의 기법이라고 할 수 있는 텁텁한 질감, 스크래치가 중첩된 화면은 삶의 흔적을 머금고 있는 것만 같은 고답적인 느낌을 자아내어 오래된 벽화 같다. 새것들이 주는 생경함보다는 오래되고 낡은 것들이 주는 친숙하고 친근한 느낌이다.

‘반유채화(反油彩畵)’는 유화라는 서양의 방법을 수용하면서도 자신만의 정서로 걸러낸 독특한 방법의 고안으로, 한국 작가들에게만 나타나는 기법이다. 박수근(朴壽根, PARK Soo-Keun, 1914-1965)의 반유채적 정감, 단색화의 무채(無彩)에 가까운 반유채적 질감과 기호의 나열에서 보여주는 반복성 등이 상통한다.

구상이나 추상의 어느 유형에도 속하지 않는 조형화(造形化)와 한국 고유의 정서 표현을 위해 착안한 오세열만의 기법은 고유함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광범위한 현대미술에서 작가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 있다.

오세열, 무제, 2014, 혼합매체, 194x130cm

© 학고재 Hakgojae, 오세열 OH Se-Yeol (사진=학고재 제공)

무엇에도 속박됨이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무작위로 낙서한듯한 화폭은 오세열의 핵심이다. 원근 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으며, 마치 어린아이의 무구의 시선으로 그린 듯하다. 오세열의 숫자들은 1에서 출발하여 10까지 연속성을 갖거나 8에서 시작하여 역순으로 작아지는 등 연상 작용을 통해 보는 자들의 상상력을 요구한다. 유년시절에 학교 칠판 위에 글자를 쓰던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혹은 누군가의 전화번호나 소중한 약속 날짜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예 다른 방향일 수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캔버스에 부착된 단추, 헝겊, 전단지, 머리핀, 병뚜껑, 알루미늄, 캔 따개 등 일상용품의 모티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연쇄적인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어 마치 일기장 같기도 하다.

오세열의 작품은 완성된 형태들이라기보다는 형태들의 잠재력이며, 지나가버린 시간과 같이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다시 취할 수 있게 해주거나, 부재하는 것들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해주는 어떤 세계 속으로 이끈다.

오세열, 무제, 2019, 혼합매체, 80.3x100cm

© 학고재 Hakgojae, 오세열 OH Se-Yeol (사진=학고재 제공)

다시 파울 클레로 돌아가 보자. 파울 클레는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든다”라는 유명한 발언을 했다. 

그렇다면 화가는 무엇을 그려야 할까? 그 ’무엇’은 언제나 화가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잘 그리려고 하는 순간 회화는 순수성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도 어떤 것을 너무 잘하려고 하다 보면 오히려 더 어긋나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래서일까? 오세열은 잘 그리려고 하지 않는다. 오세열은 관람객들이 작품을 보고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독자 스스로의 이야기들을 끄집어 내주기를 원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그림은 죽여주기로 말이다. 우리의 모든 지각은 이미 코드화 되어버렸다. 문화에 최적화되어 순수한 눈으로 보고 싶어도 속 깊이 존재하는 선입견을 떨쳐버리기란 결코 쉽지 않다. 진솔되게 무구한 눈으로 사물을 보기 위해서는 마냥 순수하기만 했던 그 눈으로 돌아가지 못함을 인정하고, 이를 뛰어넘는 것이다. 아마 오세열은 수많은 경험을 제쳐두고 순수 지각만을 인식하기, 보이는 그대로 표현해보기, 친숙한 것들을 생소하게 하는 방법을 무수히 연구하고 노력했을 것이다. 

이러한 눈으로 오세열 작품을 다시 감상한다면 새로운 해석의 길이 활짝 열릴 것이다.

 

◾ 최고운 학고재 큐레이터

<참고 문헌>
1. 「1970년대 한국 단색화 운동과 국제화」, 구진경, 2015
2. 『THE STORY OF ART』, Ernst Gombrich, 1980
3. 「기억의 층위」, 오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