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지오 계산기, 닌텐도 게임기, 소니 워크맨, 도시바 VCR 등 일본은 한 때 기술 분야에서 군림했던 나라다.    출처= MSN

[이코노믹리뷰=홍석윤 기자] 방 안에 어질러진 물건들을 로봇이 깨끗이 정리해 제 자리에 갖다 놓는다. 일본의 AI 스타트업 프레퍼드  네트워크(Preferred Networks)의 공동 창업자인 오카노하라 다이스케는 그의 회사가 개발한 인공지능 소프트웨어가 인간을 돕는 로봇(Human Support Robot, HSR)이 환경 변화에도 독특한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한다.

시장조사기관 CB인사이츠(CB Insights)에 따르면 도쿄에 본사를 두고 있는 이 회사는 20억 달러로 평가받는 일본의 자부심이라고 말한다. 일본 스타트업으로서 그런 평가를 받는 회사는 드물다. 미국과 중국에는 10억 달러 이상의 가치로 평가되는 소위 유니콘이 수백 개나 번성하고 있지만 일본에는 단 세 개의 유니콘이 있을 뿐이다.

낙오의 시작

그러나 일본이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카지오 계산기, 닌텐도 게임기, 소니 워크맨, 도시바 VCR – 일본이 한 때 기술 분야에서 군림했던 시대의 브랜드들이다. 일본은 한때 최첨단 기술과 동의어로 불려질 정도의 기술 왕국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에는 유니콘이 3개 밖에 없다. 혁신 경쟁에서 이 나라가 어떻게 뒤처지게 되었을까?

컨설팅 회사 맥킨지(McKinsey)의 연구에 따르면, 일본은 2000년 무렵 소니와 도시바 같은 일본 대표 기업들의 매출이 오늘날의 업계 리더로 부상한 애플이나 삼성에게 뒤지기 시작할 때까지는 그런대로 잘 나가고 있었다.

맥킨지의 수석 파트너인 노나카 겐지는 "일본 기업들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소비자 기술 제품을 가볍고 얇게 만드는 데 독보적인 존재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후 시장이 바뀌었다.

"이른바 초공학(super engineering) 제품의 수요는 줄기 시작했고, 대신 소프트웨어를 강조하는 소비자 중심의 기술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그런 혁신에 성공하려면 고객과 가까이 있어야 하고,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 지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하지요”

그러나 일본은 그런 점에서 미국에 크게 뒤져 있었고 문화적으로도 중국에 크게 뒤떨어져 있었다고 그는 지적했다.

게다가 미국에는 구글, 넷플릭스, 페이스북, 아마존 같은 스타트업들이 지난 20년 동안 그런 기술 혁신에 서로 앞장서 왔지만 일본에는 그런 기업들이 없었다.

"일본의 스타트업 커뮤니티는 매우 한정적이었지요. 모두가 대학을 졸업하면 대기업에 가기를 원하니까요.”

전문가들은 일본이 이러한 혁신에서 뒤떨어진 것은, 창의성과 혁신을 억누르는 위험 회피적 자금 시스템과 획일성을 추구하는 기업 문화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본에서 기술 투자를 지휘하는 것은 기업이 아니라 정부였다. 샐러리맨이 기업에 충성하도록 강조하는 기업 문화는 직원들이 직장을 떠나 자신의 회사를 창업하는 것을 좌절시킨다. 기업들은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투자 시장보다는 은행에 의존한다.

투자에 대한 접근법도 다르다. 예를 들어, 큰 위험을 감수하며 실패할 가능성에 기꺼이 도전하는 사람들과 기업에 돈을 걸려는 엔젤 투자자들은 미국과 중국에 훨씬 더 많다.

시즈오카대학교 경영정보대학원 학장 다케시타 세지로 교수는 "혁신적인 신제품을 내놓을 때 미국에서는 단 시간에 놀라울 정도의 엄청난 돈과 인력을 쏟아 붓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실패에 대해서는 눈살을 찌푸리는 문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기업에서는 성공하는 것보다 실패하지 않는 것을 더 중요시 여깁니다.”

▲ 일본에 단지 3개 밖에 없는 유니콘 스타트업의 하나인 프레퍼드 네트워크(Preferred Networks)의 인공지능 로봇이 방을 정리하고 있다.     출처= Nikkei Asian Review

부활의 조짐

그렇다고 일본이 전혀 혁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다케시타 교수는 일본에도 많은 아이디어들이 있지만, 미국의 실리콘 밸리나 중국의 선전(深圳) 만큼 화려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일본은 기존의 기술 제품을 더 쉽게 대량 생산할 수 있도록 개량하는데 매우 뛰어나다. 예를 들어, 소니는 1979년에 워크맨에 시장에 내놓으며 대히트를 쳤지만 마그네틱 카세트 기술은 10년 전부터 존재했었다.

일본은 어느 면에서는 여전히 기술혁신 분야에서 세계적 선두주자다.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가 지난달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 국민 1인당 지적재산권 특허는 그 어느 나라보다 많았다(물론 특허 출원 건수에서는 중국과 미국이 더 많지만).

WIPO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혁신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환경, 교육, 인프라, 기업들의 기술 활용도(business sophistication)’에서는 크게 뒤쳐졌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올해 초 WIPO의 글로벌 혁신평가 목록에서 15위를 차지해 지난해 보다 두 계단 떨어지며 미국, 영국, 이스라엘과 같은 나라들에 비해 훨씬 뒤쳐졌다. 1위는 스위스였다.

프레퍼드 네트워크의 오카노하라 창업자는 다양성 포용을 하나의 해결책으로 꼽았다. 그의 회사는 약 270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는데 이 중 10%는 30개국에서 온 외국인이다. 이 회사는 사무실에서 영어를 사용할 것을 권장하고, 통역사를 고용해 의사소통을 돕는다. 이에 비해, 실리콘 밸리 리더 그룹(Silicon Valley Leadership Group)과 실리콘밸리 커뮤니티 재단(Silicon Valley Community Foundation)의 2017년 보고서에 따르면, 실리콘밸리 기술인력의 57%는 외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오카노하라 창업자는 "새롭고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더 많이 생각하거나 적응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다양성이 필요하다"면서 "프레퍼드 네트워크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쉽게 채택하고 시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고 덧붙였다.

맥킨지의 노나카 파트너는 일본의 스타트업들이 세계적인 야망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많은 스타트업들이 그저 일본에서 성공하는 것에 만족합니다. 일본은 작은 시장은 아니지만 미국과 중국에 비하면 작다고 할 수 있지요. 그들은 사업을 시작할 때 미국과 중국에 진출해 그곳에서의 성장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기존 회사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소프트뱅크가 지난 주, 전에는 야후 재팬(Yahoo Japan)이라고 불렀던 제트 홀딩스(Z Holdings)와 메신저 앱 라인(Line)을 합병하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일본 인터넷 회사들은 미국과 중국에 뒤쳐져 있고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아시아 국가들로 확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 프레퍼드 네트워크(Preferred Networks)의 오카노하라 창업자는 일본 스타트업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꽃피우기 위해선 다양성을 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출처= Preferred Networks

투자자 찾기

강력한 투자자들이 회사를 성장시킨다. 그러나 투자자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야말로 많은 일본 스타트업들이 직면하고 있는 또 다른 장애물이다. 소프트뱅크의 창업자이자 억만장자 기술투자자인 손정의 회장은 일본 내 최대 기술 지지자지만 그가 운영하는 1000억 달러 규모의 비전 펀드는 일본 스타트업에 한 푼도 투자하지 않았다.

비전펀드는 미국의 차량호출업체 우버, 중국 중고차 스타트업 처하오뚜어(車好多, Chehaoduo), 인도의 호텔 체인 오요(Oyo)에는 수 십억 달러를 쏟아 부었다. 비전펀드가 일본 기업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은 일본 스타트업들이 규모가 작아, 가까운 시일 내에 상장할 수 있는 기업을 찾는 손회장의 기준에 마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프레퍼드 네트워크의 오카노하라 창업자는 손회장의 일본 기업 경시를 한 마디로 일축했다.

“일본의 기술 환경이 매우 열악합니다. 중국 같은 나라와 비교하면 기회가 훨씬 적지요.”

하지만 그의 회사는 일본의 또 다른 대기업 도요타의 관심을 자극했다. 도요타는 지난 2014년부터 프레퍼드 네트워크와 공동 연구 개발을 시작했다. 2015년 이후 도요타는 이 회사에 110억 엔을 투자해 인공지능, 로봇, 자율주행기술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도요타의 투자는 프레퍼드 네트워크가 AI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데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프레퍼드 네트워크가 기술을 제공한 로봇은 도요타가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