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Omnes viae Romam ducunt)는 말이 있다. 과장이 아니다. 도시국가에서 출발해 대제국이 된 로마는 주력인 중장보병을 빠르게 기동시킬 도로가 필요했고, 그렇게 닦은 길이 3세기 말 기준으로 무려 8만5000Km라고 한다. 경부고속도로 총 길이가 416Km라는 점을 고려하면 압도적인 규모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제국으로 가는 기술전쟁
21세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기술은 도로와 같다. 모든 것의 중심이자 핵심인 '제국'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가 되어 모든 것을 연결하는 사물인터넷의 핵심이 됐고, 인공지능과 클라우드가 지원하는 생태계가 됐으며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연결하는 플랫폼으로 거듭나고 있다.

미중 경제전쟁의 이면에는 기술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두 수퍼파워의 격돌이 벌어지고 있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미국과 중국의 자리를 넘보는 제 3지대의 행보도 빨라지고 있다. 나아가 전통의 강자 유럽이 미국과 벌이는 치열한 방어전이 벌어지고 있으며, 기득권과 비기득권의 전투가 암호화폐라는 전혀 다른 공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이들이 기술패권을 차지하려는 이유는 '제국'이 되기 위함이다. 이는 역으로 제국이 되려면 기술을 가져야 한다는 절대적인 명제가 된다. 여기서 궁금해진다. 우리는 이 흐름에 대비하고 있을까?

한일 경제전쟁, 그리고 우리
일본은 G20 정상회의가 끝난 후 7월부터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한편 포토레지스트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불화수소 등 3대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수출에 제동을 걸었다. 막판까지 두 나라 정재계 인사들이 만나 물밑협상을 벌였으나 한일 경제전쟁의 불길은 막을 수 없었다.

이후로는 난타전이 벌어졌다. 당장 국내에서는 반일감정이 고조되며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강하게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도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초강수를 뒀으며 아예 지소미아 중단을 선언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22일 정부가 지소미아 유지로 가닥을 잡으며 파국은 면했지만, 상황은 여전히 불안하다.

국내 대기업들도 비상등이 들어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급거 일본으로 날아가 현지 파트너와 접촉했으며, 컨틴전시 플랜까지 가동했다. 협력사들이 재고 확보와 관련해 보관비 등 비용이 발생할경우 이를 삼성전자가 책임지겠다는 파격적인 결단이다. 나아가 물량이 예상처럼 소진되지 않아도 그 부담은 온전히 삼성전자가 책임지겠다는 뜻도 밝혔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일본이 전격적인 금수조치까지 취하지는 않아도, 삼성전자 내부에서는 사태를 심각하게 보고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만 현재 업계의 분위기는 다소 정중동이다. 심지어 '기이한 싸움'이라는 말이 나온다. 두 나라가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걸고 싸울태세를 보이고 있으나 실질적인 액션에는 미온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이 최근 3대 핵심소재 수출길을 일시적으로 모두 열어주며 '정말 기이하다'는 말이 많이 나오고 있다. 복수의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최근 한국을 대상으로 액체 불화수소 수출길을 전격 열어줬다. 일본의 스텔라케미파의 물량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허가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이 지난 7월 수출규제 발표 직후 주문한 물량이다.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핵심 소재 수출길을 열어주고 있으나, 역시 방심은 금물이라는 말이 나온다. 당장 이번 액체 불화수소 수출도 한일 경제전쟁 직후인 7월에 신청된 물량이다. 조만간 수출 심사 과정을 90일로 규정한 기일을 넘길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일본이 '어쩔 수 없이' 수출길을 열어줬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는 일본이 '경제전쟁을 당분간 이어갈 것'임을 시사한다는 말이 나온다.

나아가 한일 경제전쟁의 양상과는 무관하게, 수출지향국가인 대한민국이 이번 일을 계기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바로 '준비하는 것'이다. 당장 일본의 소재 수출 금지를 두고 일각에서는 "글로벌 분업을 무시한 일본의 잘못된 처사"라는 반응이 나오고, 이는 사실이다.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분업을 무시하는 일본 정부 차원의 결단을 미리 예상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고, 그 자체로 비판받을 일도 아니다.

그러나 기술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상황판단, 나아가 플랜B는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특히 수출지향적인 경제모델을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경우 이 부분에 있어 최대한의 대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공학인사이트 연구소의 박성출 소장은 "글로벌 기술 패권경쟁은 국가 단위의 전투로 벌어지고 있으며, 여기에는 일반적인 경제논리도 보이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말 그대로 패권싸움인 셈"이라면서 "한국은 플랜B를 마련하는 한편 충격에 대비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나아가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통해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러한 대응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점이다. 특히 인재관리에 있어 낙제점이다.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가 최근 '2019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구자'를 발표한 결과 전세계 60여개 국에서 총 6216명이 HCR(논문의 피인용 횟수가 많은 상위 1% 연구자)로 선정된 가운데 한국은 41명만 이름을 올렸다. 지난해 58명에서 13명이 감소한 수치다. 반면 미국은 전체 HCR중 44%인 2737명의 연구자를 배출해 1위를 차지했고 중국은 영국을 누르고 2위에 이름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