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CNBC는 지난 8일 아일랜드 데이터보호위원회(DPC)가 페이스북의 유럽연합(EU) 일반정보보호법(GDPR) 위반 사례를 발표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지난해 5월 제정된 GDPR을 위반할 경우 연간매출의 4%까지 벌금으로 내야하는 가운데, 그 칼날이 페이스북을 정조준한 셈이다.

아일랜드가 직접 GDPR을 무기로 페이스북 제재의 선봉에 선 장면이 의미심장하다. 지금까지 아일랜드는 낮은 법인세를 매개로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유럽 본사를 유치했고, 이를 통해 공존했던 대표적인 국가다. 그러나 최근 아일랜드 DPC는 페이스북은 물론 애플, 트위터, 구글을 대상으로 강도높은 조사를 벌이는 강공모드를 보여주고 있다.

업계에서는 아일랜드의 변심을 기점으로 유럽의 '반' 실리콘밸리 정서에 주목하고 있다. 서구권의 뿌리인 유럽이 미국과 본격적인 기술전쟁을 벌이며 '영토 수호전'을 벌이려는 행보가 눈길을 끈다.

▲ 미국 실리콘밸리 문화는 세계적인 대세가 됐다. 출처=갈무리

긴밀한 공조의 역사, 파탄난 관계
유럽과 미국은 2차 세계대전 후 사실상 공동 운명체로 활동했다. 대영제국의 패권이 자연스럽게 미국의 몫이 되는 과정에서 어떠한 폭력과 출혈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마치 한 몸처럼 세계경영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공조는 최근까지 유지됐다. 단적인 사례가 에드워드 스노든과 줄리언 어산지 사태다. 이들은 초강대국 미국이 세계의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수집한다고 폭로하고 자신의 파트너로 영국을 선택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미국의 정보패권이 강해질수록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유럽은 위기를 느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이는 장고 끝 악수였다. 한때 대영제국의 패러다임을 통해 세계를 운용해 본 경험이 있는 영국은 21세기 정보를 쥐고 있는 미국이 가장 훌륭한 파트너라는 점을 강렬하게 자각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영국에 기댔던 줄리언 어산지와 에드워드 스노든은 소위 협공을 당했다. 줄리언 어산지는 영국에 들어갔다 부랴부랴 에콰도르 대사관으로 피신했으며, 에드워드 스노든을 취재했던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당국으로부터 보복성 조사를 받아야 했다. 유럽과 미국의 공조는 여전히 강했다는 뜻이다.

문제는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아닌, 국가와 민간의 관계에서는 전혀 다른 그림이 펼쳐지는 순간이다.

가디언을 비롯한 외신은 2015년 3월 벨기에 연구진이 공개한 보고서를 인용해 페이스북이 무차별적으로 웹 이용 경로를 추적했다고 밝혔다. '페이스북의 프라이버시정책은 EU법 위반이다'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해당 보고서는 페이스북이 로그인하지 않았거나 계정이 없는 비회원은 물론, 경로추적을 거부한 이용자들의 웹 경로까지 추적했다고 폭로했다. 2014년 시작된 잊혀질 권리를 둘러싼 논쟁을 바탕으로 구글과의 '전쟁'을 시작한 후 페이스북까지 사정권에 포함시킨 셈이다.

여기에 미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유럽 조세회피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당장 구글은 유럽에서 소위 '더블 아이리시 위드 어 더치 샌드위치(Double Irish with a Dutch Sandwich)'로 불리는 조세회피 기법으로 비판을 받았으며 무자비한 과징금 폭탄을 맞았다. 여기에 미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유럽 시장 반독점 심사에 줄줄이 걸리는 한편, 일각에서는 '기업 쪼개기'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과 직면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유럽은 미국이라는 정부와 공조할 때 '최대한의 인내'를 보여줬으나, 상대가 민간 기업일 경우 가차없이 '칼 춤'을 추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이유가 뭘까? 유럽의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에 대한 압박은 시장 지배력 남용 억제와 토종 ICT 경쟁력 강화라는 두 개의 포석이 깔렸다는 것이 정설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정보 유출에 대한 우려가 깔렸다는 평가다. 모든 정보가 ICT 플랫폼에 저장되는 현재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유럽 시장을 장악할 경우, 유럽은 미국과 비교해 일종의 정보 비대칭 상황에 빠지게 된다. '정보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상황에서 일개 기업이 유럽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확보하는 것은 유럽의 수뇌부에게 있을 수 없는 중대한 위기다.

최근에는 더 심각한 문제가 벌어졌다. 바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등장에 따른 유럽의 변화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선과 동시에 강력한 보호 무역주의로 일관, 중국과 경제전쟁을 벌이는 한편 대서양 건너 유럽에도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기후변화 및 자유무역통상의 범위를 두고 격렬하게 충돌하던 양측이 본격적인 경제전쟁을 벌이는 셈이다. 특히 지난 10일 WTO가 미국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럽의 에어버스 불법 보조금 지원 사실을 인정한 후 분쟁해결기구(DSB) 회의를 통해 미국이 연 74억9662만달러 규모의 EU 상품 및 서비스 교역에 관세 부과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승인하자 분위기는 더욱 험악하게 돌아가고 있다.

유럽 입장에서는 미국 정부와는 공조하고 미국의 기업은 경계하는 투트랙 전략에서 미국 정부, 기업 모두와 날을 세우는 원트랙 전략에 나설 수 밖에 없다. 당연히 나름의 여지가 있는 정부와의 대결보다, 기업과의 대결에 화력이 집중될 수 밖에 없다. 최근 EU는 집행위원회 수석 부위원장을 맡고있는 마르그레트 베스타거 EU 경쟁담당 집행위원의 권한을 대폭 키우며 총공세에 나설 채비를 마쳤다.

"유럽은 사라지지 않는다"
유럽과 미국의 경제전쟁, 그리고 유럽과 미 실리콘밸리 기업의 기술전쟁을 확실하게 이해하려면 유럽의 입장에서 보는 시각도 필요하다. 유럽이 실리콘밸리 기업을 경계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유럽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는 시장 독과점, 정보의 유출 등의 현안보다 상위개념이다.

유럽의 문화권력인 프랑스의 행보가 의미심장하다. 실제로 프랑스는 검색엔진 분야를 독자적으로 구축하려는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구글의 공습에 대비해 자체적인 토종 포털의 등장을 꾀한 셈이다. 독일과 협력해 `나는 찾는다`라는 의미의 라틴어인 `콰에로(Quaero) 프로젝트‘를 가동한 것이 단적인 사례다. 자크 시라크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구글, 야후 등 미국 업체들이 장악하고 있는 검색엔진 시장에 프랑스와 독일이 대항해야 한다"고 말해 유럽의 자체 검색엔진 개발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물론 콰에로 프로젝트는 실패했다. 미디어 서비스 및 장비 회사인 톰슨과 프랑스의 국가 과학연구센터(NSRC)가 팀을 이루고 미디어 그룹인 베텔스만을 내세운 독일의 팀이 의욕적으로 힘을 합쳤으나 구글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유럽은 포기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미국과의 경제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상황에서 실리콘밸리 기업에 대한 반격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며, 이를 위해 다수의 파트너들과 협력하고 있다.

야후재팬과 기업결합을 시도하는 라인의 모회사 네이버도 유럽에게는 중요한 파트너다. 마침 네이버의 글로벌 전략은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상당하게 긍정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유럽은 아시아 시장, 지엽적으로 보면 중화권 시장 진입을 목표로만 전제한 상황에서 동남아시아 일대에 자신들의 문화를 유통시킬 플랫폼 사업자로 네이버를 택했다. 플뢰르 펠르랭(Fleur Pellerin) 전 프랑스 디지털경제 장관과 유럽 금융전문가 앙투안 드레쉬(Antoine Dresch)가 설립한 코렐리아 캐피탈(Korelya Capital)의 K-펀드1에 네이버가 함께한 것이 단적인 사례다. 현재 네이버는 영국은 물론 인공지능을 매개로 다양한 유럽 협력 작전을 펼치고 있다.

유럽의 또 다른 선택은 중국이다. 특히 화웨이와 밀접한 연결고리를 보여줘 눈길을 끈다.

현재 미중 경제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가운데 미국의 칼날은 화웨이를 향해 있다. 이 지점에서 유럽과 화웨이의 교집합이 선명해지고 있다. 최근 유럽 각 나라들이 속속 화웨이 통신장비를 채용하는 대목이 중요하다. 영국과 네덜란드에 이어 유럽의 자존심인 독일도 화웨이의 손을 잡았다. 실제로 로이터 및 화웨이는 지난 10월 독일 정부가 5G 네트워크와 관련해 준비하고 있는 보안 가이드라인에 특정 기업을 배제하지 않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슈테판 자이베르트(Steffen Seibert) 독일 정부 대변인은 이날 "우리는 어떤 주체 또는 기업을 배제하는 선제적 결정을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화웨이는 유럽 최초의 5G 공동 이노베이션 센터를 스위스에 설립하기도 했다. 화웨이는 이 곳에 최신 기술을 갖춘 오픈랩을 운영한다. 애플리케이션 개발자는 오픈랩에서 엔드투엔드(End-to-End) 라이브 5G 네트워크를 이용, 상용화 이전 단계의 애플리케이션이나 솔루션을 실제 5G 환경에서 테스트할 수 있다. 또, 사물인터넷(IoT)  센서 등의 부품과 테스트용 기기도 사용할 수 있다. 선라이즈는 스마트 농장, 스마트 제조, 게임 등 다방면에서 5G를 활용할 예정이다.

▲ 화웨이와 선라이즈가 만나고 있다. 출처=화웨이

라이언 딩(Ryan Ding)  화웨이 이사회 임원 겸 통신네트워크 비즈니스 그룹 사장은 "5G 비즈니스 성공을 위해서는 건강하고 풍부한 환경이 필요하기 때문에, 양사는 5G 서비스 혁신과 기술 개발을 위해 5G 공동 이노베이션 센터를 설립했다"고 설명했다. 올라프 스완티(Olaf Swantee) 선라이즈 최고경영자(CEO)는 "5G 선도 기업인 양사는 유럽 최초의 5G 공동 이노베이션 센터를 개소함으로써 다시 한 번 새롭게 도약했다"며 "민간과 공공 분야에 모두 활용 가능한 5G 애플리케이션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특히 세계 최초로 4K 해상도의 클라우드 게임 서비스를 선보이게 돼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결국 유럽과 미국의 기술전쟁은 유럽 시장으로 진출한 미 실리콘밸리 기업을 막으려는 유럽의 방어전과,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 아시아 및 중국과 손을 잡는 유럽의 행보로 설명할 수 있다. '나를 지켜라'는 절대적인 명제로 촉발된 '대서양 기술전쟁'의 향배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