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 헤이그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네덜란드 노동조합원들. 현수막에는 "좋은 연금은 최소한의 품위의 문제"라고 씌어 있다.    출처= MSN

[이코노믹리뷰=홍석윤 기자] 세계 최고의 연기금 제도로 평가받는 네덜란드 연기금이 기록적인 저금리(심지어 마이너스 금리)로 인해 엄청난 압박을 받으면서 한때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은퇴자 급여를 삭감해야 할 위기에 놓였다고 CNN이 2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코 앞에 다가온 이 문제를 긴급하게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퇴직자 수가 계속 늘어나는 상황에서 연금 삭감이라는 비상 사태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우려가 증폭되고 있는 것이다.

네덜란드 근로자들은 퇴직하면 일반적으로 평균 임금의 약 80%에 해당하는 연금을 받는다. 그러나 계속되는 저금리로 연금 관리가 압박을 받게 되자 급여를 줄이거나 아직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보험료를 인상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회계와 신뢰성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네덜란드 연기금이 최대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거의 모든 국민들이 정부나 고용주를 통해 연금 혜택을 받는 네덜란드 연기금은 글로벌 컨설팅회사 머서가 집계하는 2019년 세계 연기금 평가(MMGPI 2019)에서도 부동의 1위를 차지했다.

글로벌 연기금에게 저금리는 최악의 시기에 찾아왔다. 인구통계학적 측면에서 엄청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고령자의 급속한 증가)에서 투자 수익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게다가 연금 재정을 감당할 젊은 노동자들은 줄고 있다.

지난주 발간된 30개 선진국 연기금 평가보고서(Group of 30)에 따르면 2050년이 되면 이들 국가들은 은퇴 후 국민들에게 재정 안정을 제공하는 데 15조 8000억 달러가 부족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는 2017년 1.1조 달러의 무려 15배에 달한다. 그것도 경제 성장, 임금, 연금투자수익에 대한 낙관적인 가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200여 개의 연기금을 관리하는 네덜란드 연금협회의 샤크티 람바란 미슈레 회장은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다. 지금은 비상 상황"이라며 정부가 직접 개입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 모른다고 말했다.

비상등이 켜졌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네덜란드 정부 탓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중앙은행들을 가지고 있는 미국, 독일, 일본 같은 나라에 그 원인이 있다.

세계 각국 중앙은행들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전례 없는 실험을 수행했다. 부진한 글로벌 경제를 회복시킨다는 명분 하에 그들은 역사상 최저 수준으로 금리를 떨어트렸다. 특히 유럽과 일본은 각각 2014년과 2016년부터 마이너스 금리에 진입했다. 게다가 각국 중앙은행들은 채무 비용을 장기적으로 낮춘다는 목표로 대대적인 자산 매입 프로그램을 통해 채권을 사들였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와 같은 정책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마이너스 금리의 영향은 가장 먼저 일반 은행들에게 미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중앙은행에 그들의 돈을 맡겨 두기 위해 이자를 받기는 커녕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저축한 사람들도 피해를 입었다.

이제 그 영향이 연기금에 미치고 있는 것이다. 연기금은 연금 수급자들에게 급여를 지불하기 위해 그동안 안정적 수익원이었던 채권에 투자해 왔다. 그러나 독일의 채권 수익률이 마이너스로 전환하면서 그들은 다른 투자처를 찾아야 했다.

네덜란드의 연금제도는 크게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모든 사람에게 지급되는 부과방식(pay-as-you-go, 현 근로세대가 현 퇴직세대의 연금재원을 부담하는 방식)의 국가 연금이고, 다른 하나는 보험료가 대개 노조와의 협상에 의해 결정돼 직원과 고용주가 함께 분담하는 민간 연금이다.

대부분의 근로자들은 이 두 가지 모두에 접근할 수 있다. 국가 연금과 개인 연금 모두 높은 신뢰도를 자랑하기 때문에 그들은 비교적 높은 가계부채 수준에도 불구하고 은퇴 이후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연기금 자산은 총 1조 5000억 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큰 연금 적립금 풀 중 하나다.

그런 환경에서 어떤 삭감이라도 생긴다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네덜란드 정부는 2020년에는 연금 수급자의 약 절반이 연금 삭감에 직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네덜란드 최대 노동조합인 FNV의 연금문제 책임자 투르 엘징가는 "우리는 연기금의 안전 유지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며 “만약 상황이 해결되지 않으면 전국의 노조원들이 항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커지는 위기

네덜란드 정부는 인구통계학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 개혁안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는 2024년부터 정년을 67세로 늘리고 이후부터는 예상 평균 수명이 1년 증가할 때마다 은퇴 시기를 8개월씩 연장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급한 문제는 저금리로 인한 비상사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다.

네덜란드 은행 ING의 마르셀 클록 이코노미스트는 "우리는 지금 같은 저금리를 본 적이 없다”며서 "연금제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소비자들은 지출을 억제하고 경제 전체에 충격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암스테르담에 본부를 둔 머서의 연금 전문가 마크 헴스커크는 “이 문제로 인한 긴장은 네덜란드에 그치지 않는다”며 “덴마크까지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역설적으로 더 엄격하고 더 신뢰할 수 있는 연금 제도가 있는 나라일수록 더 복잡한 문제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연금이 보장된 나라일수록 문제는 더 심각할 것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초저금리라는 비정통적 정책을 구사해 온 중앙은행들에게 연금 문제는 광범위한 우려의 씨앗이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지난 9월 금리를 마이너스 영역으로 밀어 넣고 3조 달러에 달하는 자산매입 프로그램을 재개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전례 없는 반대에 직면해 있다. ECB 집행위원이자 네덜란드 중앙은행 총재인 클라스 크노트는 “ECB의 결정은 현재의 경제 상황에 적절하지 않다"며 드물게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이달부터 ECB 총재 임기를 시작한 크리스틴 라가르드는 마이너스 금리가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를 인식하고 자신의 임기 중에 재검토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네덜란드 연기금의 관점에서 고통스러운 저금리가 없어질 것 같지는 않다. 이제 네덜란드 정부가 내년에 제도 개혁을 시행하기 전에 상처를 얼마나 완화할 수 있을지의 문제만 남았을 뿐이다.

네덜란드 최대 연기금 중 하나인 ABP의 워트만 쿨 회장은 "지속적인 저금리로 연금 삭감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될 것"이라고 “연금수급자들은 이것을 분명히 고려해야 한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