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양인정 기자] 기초생활 수급을 받는 정씨는 최근 20년 전에 사업을 하다 진 빚 가운데 남아있는 마지막 빚 1000만원을 정리했다. 정씨의 빚 증서가 대부업체에 거듭 팔리면서 미처 알지 못했던 빚이었다. 빚 독촉은 계속됐지만 수입도 없고 병까지 들어 갚을 여력이 없었다. 원금 280만원이었던 빚은 이자가 붙어 1000만원이 됐다.

시민단체 주빌리은행이 나선 것은 대부업체가 정씨를 상대로 소송했을 무렵이었다. 주빌리은행은 채권자와 빚 조정 협상을 했다. 1000만원은 약 70만원을 일시로 갚는 조건으로 탕감됐다. 빚은 주빌리은행이 대신 갚았다. 채무조정에 지출된 이 70만원은 SK로부터 지원 받은 돈이다.

SK그룹이 주빌리은행에 채무조정 자금을 지원했고, 주빌리은행이 채권자와 협상한 셈이다. 주빌리은행은 이와 같이 SK의 지원을 받아 현재까지 23명의 어려운 환경의 채무자를 도왔다.

정부가 지난달 8일 180만명의 채무불이행 금융소비자를 위해 채무조정 서비스업을 도입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SK그룹의 취약채무자에 대한 지원이 채무조정 업계의 조명을 받고 있다. 채무조정 서비스업 시장에 대한 롤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다.

SK는 지난 2년 동안 지정 기탁의 방식으로 금융 취약계층을 지원했다. 지정 기탁사업은 특정 사업을 위한 기부다. SK는 채무조정에 전문성을 갖춘 주빌리은행에 기부를 하고, 주빌리은행은 이 기부금으로 정씨와 같은 사정의 채무자를 위해 채무조정 자금으로 활용했다.

SK는 2년에 거쳐 이 사업에 3000만원을 지원해왔다. 아직은 실험적 사업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 사람의 채무자에게 적용되는 채무조정 협상비용은 100만원. 채무조정의 기술에 따라 수천만원의 빚도 이와 같이 100만원으로 조정될 수 있다.

사업은 실험적인지만 취약 채무자가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빚 독촉에 발목 잡힌 채무자가 경제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  

주빌리은행의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2년 동안 SK의 지정기탁금으로 도움을 받은 채무자는 모두 23명이다. 이 가운데 14명은 지난 2018년 지정기탁금 2000만원으로 총 1억3000만원의 빚을 조정했다. 또 올해 10월까지 SK의 지원금 1000만원으로 지원받은 채무자는 9명이고 조정된 빚은 1억7200만원이다.  3000만원으로 현재까지 3억200만원의 빚을 탕감받은 것.

SK의 지원금으로 도움을 받은 채무자들은 장기간 빚 독촉으로 주민등록이 말소됐거나 압류 걱정으로 4대보험 조차 가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가운데는 암투병 중에 과거 워크아웃 빚 조정 과정에서 누락된 빚으로 고통을 받았던 채무자와 살림살이 압류로 월세방에서 쫓겨난 채무자의 사연도 있었다. 모두 채무조정 후 정상적인 사회활동과 경제활동이 가능하게 됐다.

기부와 지원형태로 채무조정을 하는 사례는 신용회복위원회의 채무조정 절차에서도 볼 수 있다.

기부금 지정단체이기도 한 신복위는 지자체의 기부를 받아 채무조정 채무자에게 소액으로 무이자 대출을 해 채무자의 재기지원을 돕고 있다. 주빌리은행이 SK의 기탁을 받아 취약 채무자를 돕는 것과 유사한 시스템이다.

◆채무조정 서비스업 도입에 주목받는 신복위·주빌리은행 '채무조정 시스템'

기업이 참여한 채무조정이 활성화되면 채무자가 생산활동에 참여할 수 있어 장기적으로 내수 활성화를 가져오는 효과도 있다.  

이와 같이 채무조정의 순기능이 부각되면서 앞으로 도입될 채무조정 서비스업의 내용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채무조정 서비스업이 채권 금융회사에 일방적인 손해를 끼치는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와 관련 채무조정 전문가들은 채권자가 반드시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반박의 근거는 빚 증서의 유통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원금이 100~200만원의 빚도 10년,20년동안 여러 대부업체를 거쳐 매각을 거듭하면 이자가 붙어 수천만원으로 불어나는데, 대부업체는 이런 빚 증서를 원금의 3%~5% 수준에서 매입한다. 100만원의 빚 증서를 3만원~5만원이면 살 수 있다는 것. 싼값에 산 빚 증서로 비용, 시간, 노력을 들여 채무자를 무분별하게 독촉하는 것보다 채무조정 중재자가 나서 조정을 하는 편이 채권자에게도 이득이라는 주장이다.

상환능력이 없는 채무자와 헐값에 빚 증서를 사서 비용을 들여 채권을 추심하는 채권자 사이에서 채무조정의 가능성은 항상 존재하는 셈이다. 정부가 도입하려는 채무조정서비스업의 취지도 여기에 있다.

채무조정 서비스가 어떤 방식으로 도입될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 업계 반응이다. 이미 외국에는 민간 영역에서 사전 채무조정이 활성화 된 지 오래됐다. 미국의 채무조정 서비스업은 기업의 영역까지 확대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용회복위원회와 주빌리은행이 조직과 시스템을 갖춰 사적 채무조정을 해왔다.

신용회복위원회는 지난 7년 동안 제도개선을 통해 탄력적인 채무조정 제도를 고안하고 이를 적용해 왔다. 최근에 신복위는 채권금융회사와 간담회를 갖는 등 스킨쉽에 방점을 두고 조정자의 역활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한편 주빌리은행은 채무자의 개인정보동의서를 활용, 채무자가 심리적 위축을 느껴 대화하기 어려운 대부업체을 중심으로 채무조정 협상을 해왔다.  

신복위의 채무조정 시스템은 신용상담사 자격과정에서, 주빌리은행의 채무조정 시스템은 금융복지상담사 양성과정에서 교육과정으로 체계화됐다.

향후 도입될 채무조정서비스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채무조정을 빌미로 채무자와 짜고 재산을 숨기거나 채무조정을 염두해 두고 일부러 빚을 늘리는 시도가 그것이다.

이와 관련 금융위 관계자는 "금융기관이 채무조정안을 수락한다는 것은 연체사유, 소득, 재산 등 채무자의 사정에 대한 정보공개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며 "채권금융회사가 채무조정에 앞서 채무자의 빚 조정 요구에 대한 진위를 살펴보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금융위원회의 금융권 개인 연체채권 관리개선 추진배경 및 기본방향에 따르면 연간 약260만명이 단기 연체채무자다. 또  연간 26~28만명이 금융채무불이행자로 등록되고 있다. 연체일수 90일을 기준으로 그 이전까진 단기 연체채무자, 그 이후는 금융채무불이행자로 분류되어 신용등급 급락과 채무불이행 정보 공유로 금융·경제활동이 제약되고 있다. 금융당국은 연체 90일이 넘는 금융채무불이행자가 전체 금융채무자 1900만명의 10%인 180~190만명 수준으로 파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