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지웅 기자] 인공지능(AI)이 제약업계의 새로운 무기로 떠오르고 있다. 사람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신약 후보물질을 발굴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약 3년 전 이세돌 9단과 세기의 대결을 펼친 구글 딥마인드의 AI ‘알파고’가 일으켰던 충격과 공포가 또다시 엄습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번엔 공포심보다 기대감이 더 크다. AI가 비효율적인 기존 신약개발 방식에 혁신을 꾀하고 우리나라 제약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싹트고 있다.

주철휘 인공지능신약개발지원센터 부센터장은 “알파고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딥러닝이라는 AI 기술은 어떤 면에서 우리나라가 후발주자지만 AI 신약개발은 선진국과 동일 선상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면서 “시장에 기회가 많을 때 집중해 주인 없는 미래의 땅을 선점한다면 글로벌 제약사를 단기간에 추격하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철휘 인공지능신약개발지원센터 부센터장이 AI 신약개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출처=한국제약바이오협회

신약 후보물질 발굴부터 검증까지 단 46일 

흔히 AI는 ‘데이터’를 먹고 자란다고 말한다. AI가 사람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이유도 데이터에서 찾을 수 있다. AI는 컴퓨터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과거에 불가능했던 양질의 데이터를 대량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아울러 그래픽처리장치(GPU) 등 뛰어난 연산능력이 더해지면서 이론에만 머물던 AI가 결과물을 내놓기 시작했다.

특히 AI는 ‘제약업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약개발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24시간 멈춤 없는 탁월한 연산능력으로 빠르게 데이터를 분석하고 학습해 임상연구를 효율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인공지능신약개발지원센터에 따르면 신약 개발 과정에서 한 명의 연구자가 조사할 수 있는 자료는 1년에 200~300여 건에 불과하지만 인공지능은 100만 건 이상의 논문을 살펴보고, 동시에 400만 명 이상의 임상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다. 

주 부센터장은 “AI 도입은 전통적인 방법과 달리 비용과 기간을 절감해 생산성 향상에 부응할 수 있다”며 “신약 하나를 개발하는데 소요되는 통상 10~15년의 기간과 1~2조원의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미국의 AI 신약개발 스타트업 ‘인실리코 메디슨’은 AI 시스템 ‘GENTRL’을 이용해 신약 후보물질 발굴부터 검증까지 걸리는 시간을 단 46일로 단축했다. GENTRL는 알파고와 마찬가지로 딥러닝 기반의 AI 시스템으로 소분자 화합물 발굴 및 검증에 활용된다. 인실리코 메디슨은 GENTRL을 통해 섬유증 등 여러 질병에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진 DDR1(Discoidin domain receptor1)의 활성을 억제하는 신약 후보물질을 개발하는 임상시험을 진행했다. DDR1 억제제는 글로벌 제약사 제넨텍에서 개발한 약물이다. GENTRL이 기존 방식보다 얼마나 효과적으로 신약 후보물질을 발굴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번 실험을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인실리코 메디슨은 AI 시스템 ‘GENTRL’을 이용해 신약 후보물질 발굴부터 검증까지 걸리는 시간을 단 46일로 단축했다고 발표했다. 출처=인실리코메디슨

회사 측에 따르면, GENTRL는 21일 만에 DDR1 억제제로 유망한 타깃물질 6개를 발굴했다. 이후 합성과 검증 단계에 25일이 더 걸렸다. 총 46일 만에 신약 후보물질 발굴에 성공한 것이다. 또 이 기간 동안 개발비용은 15만달러에 불과했다. 기존 방식과 비교하면 시간과 비용 면에서 압도적인 효율을 자랑한다. 기존에는 약 8년의 시간과 수백만달러에 달하는 비용이 소요된 것으로 알려졌다. AI가 신약 후보물질 발굴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다.

주 부센터장은 “1조의 신약개발 R&D 비용대비 1개의 신약이 출시되는 비율은 해가 갈수록 반으로 감소하고 있다. 즉 신약개발의 생산성이 해가 갈수록 낮아져 순익을 맞추기 어려워졌다”면서 “희귀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더욱 빠르게 저렴한 비용으로 치료할 수 있는 신약을 공급할 수 있다는 점에서 AI 도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갈 길 먼 AI 신약개발, 성공 사례 나와야

최근 AI 기반 신약 개발에 도전하는 기업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 AI 전문 기관인 BenchSci에 따르면 지난 9월 기준으로 기계학습 등 AI를 신약개발에 활용하는 기업은 약 150개로 조사됐다. 지난해보다 2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해당 기업들은 후보물질 발굴을 비롯해 질병기전 이해, 바이오마커 구축, 임상시험 디자인 등 신약 개발에 필요한 다양한 활동을 AI로 대체하기 위한 노력을 펼치고 있다.

우리나라도 점차 AI 신약개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대부분 AI 신약개발 플랫폼을 보유한 기업들에 투자하거나 공동 연구개발을 추진하는 등 다소 관망하는 분위기지만 SK바이오팜, JW중외제약, 신테카바이오 등 자체 AI 신약개발 플랫폼을 개발에 역량을 집중하는 기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SK바이오팜은 지난해 10월 국내 최초로 AI 약물설계 플랫폼을 개발했다. 이를 통해 신약 개발에 필요한 정보를 검색·수집하고 신규 화합물을 설계할 수 있다. JW중외제약은 자회사 C&C신약연구소를 통해 직접 실험하지 않고 질환 특성에 맞는 신약 후보물질을 골라내는 AI 기반 빅데이터 플랫폼 ‘클로버’를 구축했다. 현재까지 항암제·면역질환치료제·줄기세포치료제 등 신약후보물질 9종을 발굴하는데 성공했다. 또 신테카바이오는 AI 기반 유전체 빅데이터로 신약후보물질 및 약물 치료효과를 예측하는 플랫폼을 개발 중이다. 이 회사는 유한양행, JW중외제약, CJ헬스케어 등 다수의 국내 제약사와 손을 잡으며 AI 신약개발 활성화에 나서고 있다.

▲AI는 24시간 멈춤 없는 탁월한 연산능력으로 빠르게 데이터를 분석하고 학습해 임상연구를 효율적으로 지원한다. 출처=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전문가들은 연구 데이터 및 병원 진료정보 등 우수한 의료데이터를 다량으로 보유하고 있는 한국이 AI를 적극 활용한다면 신약 개발 역량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기회로 작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국내 제약사들이 독자적으로 AI 플랫폼과 서비스를 구축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한국의 AI 신약 개발 플랫폼 구축이 효과를 보려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주 부센터장은 “해외에서는 희귀질환의 경우 패스트트랙을 통해 AI 신약개발도 어느 정도 검증이 되면 신속하게 환자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있다”며 “정책과 규제를 완화해 희귀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들이 하루빨리 신약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산업 견인’ 측면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AI 신약개발은 성공 확률이 아직 불확실하고 전 세계적으로 임상승인을 받은 사례를 보기 어려운 상황”이라면서 “이를 감안해 AI기업이나 전문가들이 도전하고 학습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AI 신약개발 플랫폼은 우리나라 제약산업의 생산성과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를 모으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문인력 양성과 AI 기술 향상, 규제 개선 등 풀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주 부센터장은 이와 관련해 “우리나라는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개발한 신약 후보물질이나 신기술의 기초연구가 실제 약을 개발하는 산업과의 연계 과정에서 유효약물을 발굴하고 선도물질을 도출하는 부분에 취약하다”며 “AI 전문가 집단들이 제약기업과 협력해 성공사례를 만드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제약·바이오산업 전반에 단기간에 경쟁력을 강화하고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