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육중한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다. 약 34조원 규모의 반도체 펀드가 출범하며 글로벌 시장이 격렬하게 요동치는 분위기다. 업계에서는 반도체 코리아의 어려움이 이어지는 가운데 사태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새로운 군자금”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7일(현지시간) 중국이 34조원의 반도체 펀드를 조성해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한다고 보도했다. 중국 국영 담배회사 및 개발은행이 참여한 본 반도체 펀드는 액수 기준으로 메모리 반도체 2개 라인을 건설할 수 있는 비용이다. WSJ는 이를 두고 “중국의 반도체 군자금”이라고 표현했다.

중국은 2014년 1차 펀드를 조성했을 당시 메모리 반도체 자급률을 크게 올린다는 방침을 정한 바 있다. 4% 내외에서 움직이는 자국의 메모리 반도체 자급률을 2020년 40%, 2025년 70%로 올리는 것이 골자다. 그러나 반도체를 ‘산업의 쌀’로 표현하며 자급률 상승에 사활을 걸었으나 성과는 지지부진하다. 업계 등에 따르면 중국 메모리 반도체 자급률은 여전히 5% 내외다.

최근 반도체 펀드 조성에 시선이 집중되는 이유다. 중국은 1기 펀드 당시 칭화유니그룹 산하의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에 자금의 70%를 몰아주는 등 반도체 제조 지원에 집중했다. 이를 바탕으로 반도체 자급률을 끌어올리는 전반적인 컨디션을 회복하려고 했으나 아직 성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이번 반도체 펀드는 실질적인 자급률 상승에 방점이 찍혔다는 말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중국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반도체 굴기에 나서고 있으나 갈 길이 멀다는 평가다. 먼저 중국 반도체 인프라 자체가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선진 반도체 시장에 비해 중국 반도체 시장이 기술적으로 최대 10년의 격차를 보이는 가운데 LCD 시장에서 보여준 박리다매 전술을 통한 시장 교란도 어렵다는 지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디스플레이와 달리 반도체는 훨씬 델리케이트(정교한) 작업물”이라면서 “중국이 LCD 당시의 박리다매 전술을 시도한다면 당국의 지원을 받아 일시적인 점유율 상승을 끌어낼 수 있겠지만 명확한 한계도 금방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메모리 반도체 기술력이 생각보다 커다란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부분도 관건이다. 삼성전자는 이미 7월 128단 3D 낸드플래시 양산에 나섰으나 YMTC는 9월에야 64단 3D 낸드플래시 양산에 도달했다. 파운드리에서는 TSMC에 밀려 존재감을 찾는 것도 어려운 실정이다.

다만 중국 반도체 굴기가 장기적 관점에서 위협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반도체 굴기, 반도체 독립을 원하는 중국의 행보는 궁극적으로 중국제조 2025 등 ICT와 제조의 결합이라는 큰 그림을 필요로 한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추가 펀드 조성을 통해 기술력 격차를 줄이려는 시도에 나서는 한편 2025년까지 170조원을 투자한다는 큰 그림도 그린 상태다. 방심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중국은 올해 2분기 33억6000만달러를 반도체에 투자한 것으로 집계됐다. 2분기 글로벌 반도체 장비 출하액이 133억1000만달러에 그쳐 전분기 대비 3% 줄어든 가운데, 중국은 오히려 투자액을 전분기 대비 43% 늘렸다.

▲ 화성 반도체 라인이 보인다. 출처=삼성

미중 무역전쟁, 반도체 코리아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탄력을 받으며 업계에서는 미중 무역전쟁까지 출렁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현재 미중 무역전쟁은 일시적인 휴전에 돌입한 상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실무협상이 끝난 지난달 10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미중 무역협상 첫 회의를 두고 "아주 잘 됐다"면서 "좋은 협상을 했다"고 말했으나 사실상 스몰딜에 가깝다는 평가다. 관세폭탄 유예 및 농수산물 구매를 결정하는 선에서 논의가 끝났으며, 중국 화웨이 제재 및 중국제조 2025와 관련된 논의는 시작도 하지 못했다.

미국 입장에서는 특히 중국제조 2025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지 못한 부분이 우려스럽다. ‘중국몽’의 시작이자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통치철학을 상징하는 중국제조 2025는 미국을 압박해 글로벌 ICT 권력을 가지겠다는 중국의 의지다. 미국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중국의 도전이자 도발이다.

그 연장선에서 중국제조 2025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반도체 굴기가 광범위하게 벌어지는 것은 미국이 원하는 일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일각에서는 “중국의 반도체 펀드가 미중 무역전쟁의 암초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국내 반도체 업계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현재 국내 반도체 업계는 신음하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수퍼 사이클이 종료된 후 실적이 하락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으며, 별다른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3분기 반도체 사업에서 큰 힘을 쓰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D램과 낸드플래시 모두 정상 제고를 유지할 정도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현상은 상당부분 개선된 것으로 보이지만, 문제는 가격 하락세다. 특히 D램의 경우 가격 하락세가 심해지고 있어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영역에서 강력한 투자를 선언하는 한편 메모리 반도체에서 하반기 반등을 노린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글로벌 반도체 강자들에게 밀려 조금씩 경쟁력을 상실하는 분위기가 연출된다. 업계에 따르면 인텔은 3분기 33.3%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하며 반등하고 있으며 올해 삼성전자를 누르고 완벽한 글로벌 1위 반도체 업체로 거듭날 전망이다. TSMC도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발 밑의 리스크’라는 것에 이견은 없다.

내부의 동력이 모이지 않는 대목도 문제다. 지난 25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파기환송심이 열리는 등 경영과 관련된 리스크가 끊이지 않으며 논란이 지속되는 점이 눈길을 끈다. 계열사별 사업을 조율할 사업지원TF마저 동력을 상실했고, 체계적인 반도체 전략을 구성할 콘트롤 타워 부재 가능성까지 겹치며 악재가 이어지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오는 11월 1일 창립 기념식은 별도의 기념행사가 없이 조용히 지나갈 것”이라면서 “숨 죽이고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는 뜻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이런 상황에서 반도체 전략은커녕 삼성의 앞 날도 불확실성에 빠졌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삼성전자는 최근 반도체 라인 공정 일부를 확대하는 등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다만 이러한 시도도 ‘전격적인 판단’은 아니기 때문에 그 효과에 대해서는 지켜봐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삼성전자가 미중 무역전쟁에 의도치 않게 휘말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리커창 중국 총리가 지난 14일 중국 시안의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깜짝 방문한 가운데, 이를 두고 업계에서는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리 총리는 당시 공장을 방문해 "중국 대외 개방의 문은 더 커질 것"이라면서 "우리는 지식재산권을 엄격히 보호하고 중국에 등록한 모든 국내외 기업을 동일하게 대우할 것"이라고 밝혔다. 글로벌 기업들이 중국을 떠나며 신기술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외국 기업은 걱정하지 말고 중국과 함께하자"는 메시지를 보냈다는 해석이다.

삼성전자가 최근 마지막 남은 중국 스마트폰 공장을 폐쇄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결국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다시 시작되는 상황에서 “한국의 최소한 반도체에서 삼성전자와 협력한다”는 메시지를 내보낸 셈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미국의 심기를 건들 수 있는 일로 번질 수 있다. 

리 총리의 방문 후 중국 관영언론은 삼성전자가 중국 스마트폰 제조 시설을 폐쇄하며 직원에게 퇴직금을 전달한 일을 언급하며 "품격을 보여줬다"며 추켜세우기도 했다. 실제로 글로벌타임스는 16일 삼성전자가 중국 스마트폰 공장을 폐쇄한 사실을 언급하며 "삼성전자는 패배자가 아니다"면서 "품격을 보여줬다"고 보도했다. 여기서 말하는 품격은,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공장을 폐쇄하며 마지막 직원에게 갤럭시 디바이스를 선물하고 직원들에게 질서있는 퇴직금을 제공한 것 등을 말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논란으로 냉각된 양국 관계가 여전히 후유증을 앓고있는 상황에서 중국 관영언론이 스마트폰 공장 폐쇄를 결정한 삼성전자를 극찬하고 나섰다는 뜻이다.

리 총리는 중국 기술굴기인 중국제조 2025의 주창자기도 하다. 그는 실제로 2014년 3월 열린 양회(당의 전당대회에 해당하는 정치협상회의와 정기국회에 해당하는 전국인민대표회)에서 모습을 드러낸 인터넷 플러스, 그리고 중국제조 2025의 핵심 인사다. 양회 정부업무보고에서 인터넷 플러스 액션플랜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미중 무역전쟁을 승리로 끌어내기 위해 동맹국에 화웨이 배제 방침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제조 2025의 중추인 리 총리가 삼성을 방문한 장면은 그 자체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말이 나온다.

한편 SK하이닉스도 신음하고 있다. 24일 3분기 실적을 발표한 가운데 매출 6조8388억원, 영업이익 4726억원, 당기순이익 4955억원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전년동기 대비 매출, 영업이익, 순이익이 각각 40%, 93%, 89% 감소한 수치다. D램은 모바일 신제품 시장에 적극 대응하고 일부 데이터센터 고객의 구매도 늘어나 출하량이 전분기 대비 23% 늘었으나 가격 하락세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낸드플래시는 출하량 자체가 떨어지고 있다. 과도한 메모리 반도체 의존도가 SK하이닉스의 발목을 잡았다는 분석이며, 장기적으로는 중국‘발’ 리스크에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