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팔십대 중반이 넘으신 부모님 댁을 방문하고 돌아오려는데, 부친이 서류 봉투를 하나 건네며, 만약을 대비한거니 돌아가서 보라는 말을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살펴보니 두 분 중 한분이 떠났을 때, 특히 지금도 모친에 관해 모든 걸 주관하는 부친께서 갑자기 먼저 떠났을 때, 허둥지둥 하지 말고 해야 할 내용을 ‘유비무환’이라는 제목 하에 한 장으로 정리해 놓은 내용이었습니다. 장례식장은 어디, 영정 사진은 집의 어디에, 위로 예배는 딱 한번으로 해서 폐해를 최소화하고, 철저히 가족장으로 하되, 당신이 떠났을 때 절친했던 몇 분께는 상사 후에 꼭 알려주길 당부하며, 그분들의 연락처를 남겨놓았습니다. 당신께서 유사한 일로 평생 친구가 떠난 줄도 모르는 황망한 경험을 소개하며 말이죠. 또 떠날 때는 평상복중 어떤 걸로 입혀달라고.. 그걸 끝까지 읽을 수 가 없었습니다. ‘평소 준비성이 많으신 분으로 이미 조상 묘를 정리했고, 연명 치료에 대한 의사표시도 이미 해놓았는데, 무얼 이런 걸 준비하며 우울한 마음에 젖으신단 말인가’ 하며 살짝 원망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준비해도 일을 당하면 또 처음 일처럼 당황해 할 건데.. 그렇지만 자식에게 중요한 걸 단순화하고, 요약해서 전달함으로서 자식들 마음이 덜 힘들고, 주변에 폐를 끼치지 말라는 그 뜻이 전해지길 바라는 것을 알기에 순종하기로 마음먹고 크게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이제 그 서류를 한 부 복사해서 아들에게 한 부 전해주고, 그 서류를 넣은 가방을 따로 보관하고 아내에게도 위치를 얘기해야겠습니다.

자식으로서 한편으로는 숙제를 좀 덜었다고 생각되면서도, 인생길을 걸어가는 나로서는 정리된 삶, 단순화된 삶이라는 더 큰 숙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매사에 있어, 특히 귀한 일일수록 단순하게 정리해서 그것이 몸에, 마음에 기억되게 하여 집중하는 삶을 살아갔으면 하죠. 단순화 숙제를 생각하니 오래전 회사 일이 생각납니다.

회사 실무자로 일할 때 모든 보고 서류를 한 장으로 하는 ‘1매 베스트’운동이라는 기업문화를 전개한 적이 있습니다. 회사 구성원으로서 보고 시, 한 장에 중요한 걸 담을 수 있어야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능력과 자세를 요구받은 겁니다. 그것은 중요한 걸 단순화하고, 거기에 집중해야함을 말한 거겠지요. 물론 시간도 절약하고요.

최근 접한 화장품 회사 대표의 말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국내에 매장을 개장한 걸 기념하기위해 우리나라를 찾은 프랑스의 세계적인 피부 미용 전문 화장품 회사 대표는 십대 두 딸이 있는데 그들에게 권해주는 피부 관리 원칙이 있더군요.

‘화장은 최대한 늦은 나이에 시작함이 좋다.

수분 크림은 반드시 챙겨 바르는 것이 좋다.

화장을 했다면 꼭 클렌징을 하고 자야 한다.’

어떤가요? 아주 유명한 피부 전문 화장품 회사 대표의 말치고는 너무 평이하고 단순하지요?

그래도 그녀는 단순하지만 아주 중요한 것을 콕 찍어서 애기해준 것 같습니다.

즉 피부에 기억될 만한 핵심 내용을 단순화해서 얘기해 준 것은 아닐까요?

결국 평범하게 사는 나도 바래봅니다.

나도 삶의 많은 영역에서 가지치기를 통해 좀 더 중요한 것만 남기는 단순화된 삶.

그래서 위기 시에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나듯, 나도 앞으로 삶의 여러 흔들림을 통과하면서도 그 단순하지만 귀한 것으로 해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기를 말입니다.

일단 먼저 내 삶을 한 장으로 요약하는 훈련부터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