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생활 하면서 성공의 카타르시스를 맛보며 눈물을 흘린 적이 몇 번이나 있는가? 학수고대 바라던 일이 이루어 졌을 때 어른들도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반면에 분루(憤淚)를 삼킨다는 말처럼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커뮤니케이션 업무를 진행하면서 가장 감격스러웠던 일은 2003년 10월 23일 세녹스 1차 공판의 승소였다. 2002년 중반 판매점이 지방에서 겨우 두 세 곳 정도이나 들어섰을 무렵에 당시 산업자원부가 검찰에 고발을 했고, 이후 1년 반 가까이 1심 공판이 계속됐다.

변호인단은 꽤 저명했던 대표 변호사를 한 분 모셨고, 중견 규모의 로펌에서 두 세 명의 변호사가 전담으로 붙었다. 변호사들이 필요한 자료를 구하고 만드는 일 대부분 지원이 필요했다. 웬만한 자료는 다 찾아 논리와 근거를 만들어 줘야 했다. 

1심 판결이 나올 때까지 매달 한 두 번은 서초동 법원에 갔다. 주로 425호 법정에서 진행 되었는데, 당시 형제의 난으로 이슈가 되었던 모 그룹의 총수가 머리를 조아리던 모습을 직접 봤던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무지하게 잘 나갔던 음악 사이트의 형사 재판도 진행되던 곳이었다.

세녹스 재판 때면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 전국 총판, 판매점 관련 사람들이 지방에서 올라왔고, 회사 직원들, 관계 공무원들 그리고 이들 주위에 늘 함께 하던 정유사 관련 사람들도 고정 멤버들이었다. 게다가 사건이 이슈가 되면서 기자들도 여럿이 방청석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커뮤니케이터, 백 가지 일에도 다 신경 써야 해 

재판이 시작 한참 전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재판 시작할 때면 법정 뒤편 통로까지 꽉 채웠다. 나를 비롯한 회사 대표 몇몇은 일찌감치 앞쪽 자리를 잡았다. 재판 중에 변호사가 헷갈리거나 검사 측에서 예상에 없던 문제를 끄집어 내기라도 하면 바로 메모를 지에 적어서 전했고, 재판부나 검사 측에서 제기하는 문제점들은 하나도 놓치지 않도록 정리할 필요도 있었다. 

관련 자료를 구하고 정리해서 변호인단에게 넘긴 뒤엔 감수까지 했고, 기획업무에 커뮤니케이션 업무까지, 지방 총판 및 판매점주들의 고민도 들어야 했다. 언론에 어떻게든 긍정적인 면이 더 비춰질 수 있도록 몸이 열개라도 부족했다. NGO도 찾아 다니며 조금이라도 힘을 보탤 길을 찾았다. 

정신 없는 상황의 연속, 늘 급한 일들이 쌓여 있었고, 긴장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공판 날짜가 다가오면 더 초조해졌다. 재판장에서 어느 한 사람 마음 편할 리 없었겠지만, 나에게 기대고 있는 많은 사람들 탓에 겉으로 씩씩한 척 했어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떨리긴 마찬가지였다.

복잡하게 꼬여 있던 1심 재판이 종반으로 치닫던 여름 무렵부터 검사 측보다 변호인단의 논리가 앞서고 있었다. 검사 측에서 한 가지를 얘기하면 며칠 밤을 새워서라도 뒤집을 수 있는 자료를 찾았고, 세 가지 네 가지 방어 논리를 마련했다. 거기에 변론을 리드하던 경륜 높은 대표 변호사의 화술도 빼놓을 수 없는 무기였다.

정치, 언론, NGO 등등 얼굴이라도 한번 볼 수 있다면 먼 길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다. 금방 점심을 먹고도 다른 약속에 가서 거푸 식사를 하기도 했고, 새벽녘이라도 누가 만나자고 하면 달려갔다. 만나는 사람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어도 최선을 다해 이해를 구했고 진정 어린 마음을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덕분에 논리에서 앞서기 시작했던 공판이 우리 쪽으로 조금씩 기우는 감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낌새를 전혀 느낄 수 없었겠지만 나에게는 보였다. 가을로 접어들며 지루한 공방전이 마무리 될 무렵엔 공판장은 매번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만원이었다. 법정 내부 열기에 땀을 흘려야 했다.

재판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에는 판사의 목소리와 주문, 태도 등으로도 재판의 향방이 느껴졌다. 나를 비롯한 몇몇만이 그 미묘한 차이를 읽을 수 있었고, 판사의 논리에서 결론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 때까지 아무도 세녹스의 승소를 믿지 않았다. 아니 정부의 패소를 상상하지 못했다. 

 

공식은 없다. 간절히 원하고 노력하면 된다는 신념뿐

정부부처인 산업자원부가 형사 고발을 하자 바로 검사가 공소를 제기했고, 석유협회나 정유사들을 비롯한 막강한 세력이 지원을 아끼지 않은 사건이었다. 하룻강아지가 호랑이랑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갓 태어난 하룻강아지 한 마리가 티라노사우러스 공룡집단과 대적하는 형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나를 비롯한 몇몇은 죽기살기로 뭔가를 계속해야 했다. 자료를 찾고 심지어 해외에 자료를 구걸까지 해가면서 악착같이 반전의 기회를 노렸다.

판결이 있던 10월 23일, 아침에 눈을 떴는데, 집사람이 느닷없이 꿈 얘기를 했다. 집채만한 파도에 스님과 신부님이 휩쓸려 왔는데 둘이서 우리 집으로 모셔 구했다는 것이었다. 조용히 일어나 지갑에서 만원 한 장을 꺼내 손에 쥐어 주고 다른 사람에게 얘기 하지 말라며 꿈을 샀다. 그리고 그날도 어김없이 일찌감치 재판장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판결이 예정된 만큼 언론의 관심도 컸다. 그날 판사는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긴 판결문을 끝까지 읽어나갔는데, A4지 네 장이 넘었다. 귀를 기울여도 중간중간 모호한 법률 용어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함부로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게 했다. 마지막 한 문장을 읽기 전까지 결과를 장담하기가 힘들었다. 판결문은 우리 쪽 논리에 검사 측 논리도 가미되어 있었다.  

판사의 목소리를 행여 놓칠까 싶어 집중해 듣던 중 마지막 결론이 비수처럼 귀에 꽂혔다. 판결이 마지막에 이르렀는지 몰랐던 사람들은 웅성웅성 소리를 계속 냈다. 하지만 내 귀에 분명히 들렸다.

“무죄를 선고한다!!!!!!”

웅성거림 속에서 이 말이 귀에 들어온 순간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무죄’라 했지만 사람들은 “뭐래?”, “뭐라고 했는데?”라며 웅성거림이 계속됐다. 어수선한 가운데를 비집고 밖으로 뛰어 나왔다. 한달음에 계단을 내려와 주차장 한쪽 옆에 서서 먼 하늘을 쳐다 보았다. 눈물이 흘러내렸고,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마침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비를 맞고 서 있던 나에게 빨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눈물을 들킬까 싶어 돌아 선 채로 비 오는 하늘을 보며 눈물을 훔치고 다시 뛰어 올라갔다. 난리 그 자체였다. 기자들이 즉석 기자회견을 요청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몰라서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총판과 판매점 관계자들은 승소는 알겠는데, 그 담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안이 벙벙해 하고 있었다. 얼른 기자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법원 출입기자단 간사가 어느 분이신가요?”

“저기 저 분이요.”

간사 기자와 얘기를 잠깐 나누고는 법원 1층에 있는 기자실에서 간단히 기자회견을 진행하기로 했다. 대표 변호사와 대표이사만 참여했다. 양 호주머니에 있는 2대의 핸드폰이 동시에 계속 울어댔다.

“000방송국의 시사 라디오 000프로그램의 000작가입니다”

“000신문의 000기자입니다. 축하 드립니다. 잠깐 몇 가지 물어볼게요.”

혼을 쏙 빼 놓으려고 작정들을 했는지, 아는 사람들만 전화를 해도 그 수가 적지 않은데, 어찌 알았는지 서울은 물론 지방 라디오 방송국에서도 전화가 빗발쳤다. 잠깐 사이에 십 여 매체와 기자회견을 했고, 라디오뿐만 아니라 방송 촬영 스케줄도 여러 건이 잡혔다. 웬만한 연예인보다 방송 스케줄이 많았다.

그날 저녁 총판장, 판매점 관계자들이 모두들 나에게 한 두 마디씩 치하를 했다. 그들도 놀라워했다. 그리고 한 마디씩 추가했다.

“여름부터 이길 수 있다고 해도 믿기지 않았는데, 진짜로 이겼네, 구팀장 말이 맞았어.”

“눈물 흘린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었는데, 니가 진짜 세녹스의 주인이다.”

그렇게 딱 한번 하룻강아지는 티라노사우러스 여럿을 보기 좋게 꺾었다. 그 다음인 2심부터는 양상이 달라졌다. 공룡들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회사가 노릴만한 틈을 없애버렸고, 새로운 양상으로 공격했다. 이기기 위해서 당시 법률 3가지도 바꿔버리는 초강수를 뒀다. 국회본관 회의장 바로 옆에서 모니터를 통해 법률이 바뀌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면서 조여오는 압박감을 피부로 느꼈다. 더 이상 승산 없는 싸움이었다. 그 직전까지도 관련 국회의원과 당직자 그리고 국회 전문위원들을 설득하러 다녔지만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철저하게 사방팔방에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는 공룡들은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때 흘렸던 눈물의 뜨거움은 아직도 두 볼에 남아 있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