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에 굵은 저음의 중년 남성이 출연했다. 그는 어린시절 선수가 되기에 적합한지 봐준다는 구실로 운동부 코치로부터 겪은 성폭력의 아픔을 담담히 설명한다.

과거에는 어린 마음에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이를 숨겼지만 더 이상 숨기지 않고 가해자가 응당한 처벌을 받도록 하겠다면서 어린시절 성폭력 피해를 당한 다른 사람들도 용기를 내라는 요지였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소송을 담당하는 변호사 사무실의 광고였는데, 어린시절 피해를 당하고도 이것이 성폭력인지도 모르고 지나쳤거나 겁이 나서 부모에게도 이야기를 못했던 미성년자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성폭력 피해는 사건이 발생하고 일정 기간내에 이를 신고하거나 소송을 제기해야 하는데 미성년자들의 경우 대부분 성폭력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거나 가해자들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하도록 협박을 가해 대부분 이렇다할 구제를 받지 못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뉴욕주의 경우 미성년자 성폭력 피해자는 만 21세가 되기 전까지 피해사실을 밝히고 소송을 제기해야 했다.

뒤늦게 어른이 돼서 어린 시절의 기억이 성폭력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해도 이때는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소송도 제기하기 어려워진 이후다.

뉴욕주는 그간 카톨릭 교구와 보험회사 등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난 8월 어린이 성폭력법(Child Victim Act)을 발효해서 어린시절 성폭력을 당한 경우 55세 이전까지는 언제든지 가해자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했다.

미성년자 성폭력은 공소시효가 없지만 중죄가 아닌 경우에는 피해자가 23살 이하인 경우에만 가해자 처벌이 가능했는데, 이번에는 이를 피해자 연령 28세 이하로 재설정해 성인이 된 이후에도 충분히 가해자를 상대로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됐다.

특히 올해 8월 14일부터 1년간은 과거에 미성년자로 성폭력을 당했다면 얼마나 오래전인지와 무관하게 가해자와 가해자가 속해있는 단체를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다.

‘정의의 기간’이라고 명명된 1년은 많은 숫자의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들의 경우 공포와 수치심에 성폭력 사실을 공개하지 않거나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종종 성폭력 사실을 공개해도 이를 무시당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들에게 기회를 되돌려준다는데 의의가 있다.

특히나 많은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들이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카톨릭 신부들이나 아이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학교 교원이나 운동부 코치, 보이스카우트 지도자 등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해서 사실상 다른 사람들에게 마땅히 토로할 수도 없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과거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민사소송을 할 수 있도록 허용된 1년의 첫날인 8월 14일 새벽부터 수백 건의 소송이 접수됐다.

맨해튼과 브루클린 등을 포함한 뉴욕시에서만 첫날 정오까지 무려 154건의 소송이 접수됐으며 뉴욕주의 다른 지역들도 첫날에 수십 건에서 수백 건의 소송이 접수됐다.

모두 수년에서 수십년을 기다려온 피해자들의 분노와 절망이 한순간에 봇물터지듯이 밀려나온 것이다.

소송을 제기한 이들이 가해자로 주로 지목한 사람들은 카톨릭 사제들이 가장 많았고 이들이 몸담고 있었던 카톨릭 교구는 해당 사실을 무마하거나 혹은 은폐하려했던 의혹으로 함께 소송을 당했다.

또 최근 여자아이들도 단원으로 받기 시작한 보이스카우트도 어린이들을 지도하는 캠핑 지도자 등이 성폭력을 가했다고 여러 명으로부터 동시에 소송을 당했다.

이외에도 자신이 다니던 학교의 교사나 직원에게 성폭력을 당한 경우, 학교 운동부나 지역 운동 클럽 코치에게 성폭력을 당해서 이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사례가 여러 건 있었다.

또 일부에서는 자신의 친오빠나 친척 등을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하고 소송을 제기한 경우도 있었으며 일부에서는 불량청소년들을 보호·감독하던 시설에서 집단적으로 발생한 성폭력 문제로 해당 시설과 병원 등에 소송을 제기했다.

미성년자 성폭력으로 체포됐다가 자살한 제프리 엡스타인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여러 명 소송을 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