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과 외국계 기업에서 탄탄대로를 걸어왔던 전문경영인이 은퇴 후 노인전문요양기관의 운영자가 됐다. 반평생 차가운 컴퓨터 회로만 들여다보며 살아온 뼛속까지 공학자(IT인)가 은퇴 후 체온을 가진 사람들의 얼굴을 매일 들여다보는 삶을 살고 있다. 인생의 정점에 섰을 때 자신이 내려갈 길을 미리 예견하고 ‘아름답게 내려오는 법’을 고민한 사람. 이제야 주위를 돌아보며 여유롭게 내려오는 내리막길의 묘미를 막 깨닫기 시작한 사람. 강세호(56) 에스이(SE)너싱홈 원장을 만났다.

지난 17일 오후 3시 최근 개통한 판교역 1번 출구 앞 자주색 중형차 한 대가 기자 쪽으로 다가왔다. 차창이 내려가고 그 안에서 엷은 핑크색 가운을 입은 한 중년 남성이 얼굴에 미소를 띠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강세호 원장이었다. 그는 요양원에서 업무를 보다가 기자가 방문한다는 얘기에 가운도 채 벗지 않고 직접 역 앞 까지 차를 몰고 마중을 나왔던 것이다.

그 모습에서 한때 대기업과 외국계 기업의 대표였던 그의 이력들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그가 현재 얼마나 소탈한 삶을 살고 있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강 원장이 운영하는 에스이너싱홈은 동판교 바로 옆 동네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상 성남시 수정구에 속하는 곳이다. 판교역에서 성남방향으로 5분정도 달렸을까. 도로 좌측으로 노란색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저깁니다. 건물이 예쁘죠?”

도착해 가까이서 보니 올리브 그린 색의 3층 건물이다. 산책로로 조성된 작은 정원은 응달진 쪽은 눈이 녹지 않았지만 대체적으로 햇볕이 잘 들어 환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시설 곳곳은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을 타 반질반질 길이 잘든 가구처럼 온기가 스며들어 아늑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정원에서 잠시 강 원장을 모델로 사진촬영을 한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간호사들과 요양사, 너싱홈에서 거주하는 어르신들이 인사를 건네며 반갑게 맞아준다.

마치 오랜만에 찾은 고향집에 온 것처럼 따뜻함이 느껴진다. 강 원장은 너싱홈 안에 개인사무공간을 따로 두지 않고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물었더니 너싱홈에 입소한 어르신들과 그 가족들에게 집과 같은 환경을 제공하고 가족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딱딱한 원장실 대신 평범한 주택의 거실과 같은 공간에서 업무를 본다고 했다. 인터뷰는 그런 용도로 지하1층에 마련된 특별공간에서 진행됐다.

기업 컨설팅 전문가로 활동하며 노인사업 잠재력 발견
“은퇴 후 노후엔 아름답게 산을 내려가는 법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젊은 시절 앞만 보며 달려오느라 보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야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이제부터라도 주위를 챙기는 삶을 살아야지요.”
한때 잘나가던 경영인이 어떻게 노인요양사업에 관심을 갖게 됐고 돌연 너싱홈 원장이 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대한 강 원장의 답변이다.

그는 “기업의 경영자로 오랜 세월을 하다보니까 나이 50대 중반 접어들면서 미래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느껴졌다”며 “다른 전문경영인으로 몸담을 기회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건 그동안 사회로부터 받은 혜택들을 어떻게 하면 이웃을 위해 쓸 수 있을까 하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강 원장은 그동안 삼성SDS, 유니텔, 소빅, 한국유니시스 등 국내 대기업과 외국계 기업에서 전문경영인의 길을 걸어왔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그는 삶의 3분의 2를 컴퓨터와 함께 한 뼛속까지 IT인이었다. 1990년대말 한창 국내 PC통신의 열풍이 불던 때 그는 국내 인터넷통신 회사 중 하나인 유니텔 대표를 맡아 한국 IT업계를 선도해왔다.

직전까지는 삼성SDS에서 컨설팅사업부장(이사)을 맡는 등 컨설팅에도 깊은 조예를 갖고 전문경영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런 와중에 그는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맞게 된다. 당시 그는 기업에서 다양한 트렌드 조사와 미래 예측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미래 사회엔 고령화 사회가 대두되고 그로 인해 노인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야가 미래에는 각광을 받고 중요해질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것은 그가 노인문제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됐다.

고령화 사회 노인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해결방안을 찾던 중 다양한 실버산업을 알게 됐고 그 중에서도 노인복지시설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물론 당시에도 국내에 실버타운이 들어서고 있었지만 강 원장은 조금 더 적은 자본으로도 노인들의 복지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시설에 대해 연구하고 조사했다. 곧 노인요양시설이라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은퇴 후 사회복지사 자격증 취득 10년간 자원봉사 ‘내공’
컨설팅업계에 오래 몸담았던 탓에 그는 기업의 대표로 일하면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업 정보와 전략을 조언하는 일이 많았다. 그 일은 자연스럽게 노인요양시설을 운영하는 사람들을 모으고 자본을 집결하는 일로 연결됐다. 그때부터 강 원장은 뜻이 맞는 몇몇 지인들과 함께 자본을 모아 서울, 안성, 분당 등 지역에 5개의 노인요양시설을 설립했다. 현재는 그중 한 곳을 정리하고 4곳을 운영하고 있다.

이날 인터뷰를 진행한 분당 너싱홈은 2002년 설립됐다. 강 원장은 당시 기업 대표라는 본업이 있었기 때문에 노인요양시설에 관련된 일은 주말마다 자원봉사 하는 방식으로 관여해왔다. 틈틈이 공부하고 현장에서 실습하면서 노인시설에 대한 전문성을 쌓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0년이 지났다. 2010년 4월 그는 약 7년간 몸담고 있었던 외국계 기업 한국유니시스의 지사장직에서 물러나 은퇴를 하게 됐다.

그때부터 그는 사회복지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약 1년간 사이버 대학에서 관련 전공수업을 이수하고 공부해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에 도전해 합격했다. 물론 은퇴 직후 곧바로 시설의 원장이 되기 위해서 준비한 건 아니었다. 평소부터 관심이 있던 분야여서 공부를 하겠다는 계획을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고 회사를 나온 후 남는 시간에 뭔가를 배우고 하는 공부해 두는 것이 은퇴 후 남아도는 시간을 잘 활용하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일하는 것이 곧 잘 노는 것이란 평소 지론이 반영된 것이다.

강 원장은 은퇴 직후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는 것 외에 전문경영인의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일을 찾아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 실버산업 회사들은 모아 ‘유니패밀리’라는 상단(商團)을 꾸린 것이다. 유니패밀리는 실버 서비스사업을 하는 유니실버, 실버 의료기기와 실버시스템을 개발하는 에스이, 꽃배달 서비스 회사인 플라워라인, 조경회사인 자연후, 컨설팅 회사인 유니씨에스, 엔터테인먼트사인 베드 스터이 펑크, 리더십 전문 매거진 <리더피아> 등 소기업들의 결집체다.

“유니패밀리는 중소기업인들에게 사업방향을 알려주는 프로모터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들에게 길을 안내하고 보살피는 프로모터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유니패밀리를 결성해 중소기업에 자문하고 컨설팅을 하는 일을 하게 됐습니다.”

강세호 원장(맨 왼쪽)이 에스이너싱홈 직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전직 노하우로 노인요양ERP 개발·보급 등 IT기술 접목
강 원장은 지난해 10월 에스이너싱홈의 원장으로 정식 취임했다. 너싱홈에서도 그는 전문경영인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우선 너싱홈 운영에 감성경영을 최우선적으로 도입했다. 강 원장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직원들의 서비스 10계명을 만드는 일이었다. 평소 세 사람만 모여도 10계명 만들기를 즐긴다는 강 원장은 조직구성원들에겐 일할 맛이 나는 일터 분위기를 제공하고 입소 노인과 그 가족들에게는 가정과 같은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0가지 서비스 헌장을 만들었다.

‘어르신을 항상 공경하는 마음과 자세를 갖는다’ ‘방문하는 모든 고객을 반갑게 맞이한다’ ‘모든 전화통화는 예의 바르고 공손하게 한다’ ‘보호자로부터 특별한 사례비 등 금품을 받지 않는다’ 등등 항목을 보면 그다지 특별한 건 없지만 강 원장과 에스이너싱홈의 직원들은 매일 서비스 헌장을 함께 읽고 낭독하며 서비스 정신을 마음에 아로새기고 일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강 원장의 이 서비스 10계명은 지역사회에 입소문으로 퍼져 며칠 전에는 경찰청의 요청을 받고 강연을 하기도 했다.

강 원장은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석 달에 한 번씩 우수 직원들을 표창하는 한편 입소자가 밤새 임종하거나 할 때는 가족들과 함께 밤을 새우며 병상을 지키기도 한다. 강 원장은 “어떤 조직이던 일방적으로 훈계한다던지 하는 방식보다는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혁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 원장은 최근 자신의 평생토록 쌓아온 IT지식과 경험을 노인요양사업에 접목시키는데 정력을 쏟고 있다. 산업에서 필요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컴퓨터 소프트 프로그램 패키지인 ERP를 노인요양분야에 접목하는 일이다. 그동안 요양원에서 입소자들의 개인신상정보를 비롯해 건강상태, 치료상태, 생활상태 등 관리 상태들을 종이에 손수 기록하는 수작업이 주로 이뤄졌는데 요양원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를 개발해 보급함으로써 전국 노인전문요양시설들의 업무 프로세스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게 됐다.

은퇴후엔 일하는 게 여가, 열심히 일하면 늙지 않아
강 원장은 전문경영지식을 갖고 10여 년간 노인요양시설 운영과 자원봉사를 해온 결과 이제 노인시민운동가가 다 됐다. 지역에서 노인문제와 관련된 민원이 발생하면 상담이나 도움을 청하는 전화가 강 원장에게 걸려올 정도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 노하우, 인맥을 총동원해 문제를 해결해주곤 한다.

강 원장은 요즘 하루를 3일처럼 살고 있다. 그는 은퇴 준비를 하면서 은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은퇴 후 삶을 생각하면 ‘여가’를 떠올리고 어떻게 하면 잘 놀수 있을 지를 고민하는데 그의 생각은 다르다. 오히려 은퇴 후에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은퇴 후엔 “일하는 게 여가”라고 했다. 개인적으로는 스무살 무렵에 외할머니의 죽음을 지켜본 영향도 컸다.

당신께서 살아 생전 집안일 등 할 일이 많고 역할이 있을 땐 건강했는데 나중에 더 연로해져 그 일을 하지 못하고 쉬게 되자 오래 사시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일을 해야 늙지 않고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그는 은퇴 후 지금 삶에 대해 큰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 무엇보다 현역시절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달리느라 미처 돌보지 못했던 주위사람들과 이웃들을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이 다행 중 다행이다. 그는 이제 산 정상에서 아름답게 내려와야 하는 때라고 했다. 늦은 오후 짬을 내서 너싱홈에서 노인들과 함께 다정한 한때를 보내는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번진다. 힘들게 산 정상에 올랐다가 ‘야호’하고 크게 소리를 내지른 후 더 이상의 미련이 없는 듯 휘적휘적 내려오는 사람의 후련함이 깃든 미소다.

김은경 기자 keki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