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보는 시간이 갈수록 줄어든다. 드라마보다 현실이 더 드라마틱하고, 아무리 각본을 잘 짜도 실제보다 가슴 쫄깃하지 못하다. 아무리 채널을 돌려도 어쩌다 한번 인기를 모은 스타의 얼굴만 채널을 넘어 계속 반복된다. 비슷한 포맷으로 이 프로그램이 그 프로그램인지 그 프로그램이 이 프로그램인지 헷갈린다. 어디선가 계속 먹는다 요리해서 먹고, 어디 가서 먹고, 애들도 먹고, 어른들도 먹고, 혼자서도 먹고, 모여서도 먹는다.

차라리 어줍잖은 말투로 엉성한 화면과 삐뚤빼뚤 글씨의 자막으로 나온 개인 방송이 더 신선하다. 그러던 차에 재방송으로 방영되는 개그프로그램 하나에 잠시 눈이 갔다. 얼굴도 잘 알지 못하는 개그맨들 셋이 나와서 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극중 설정상 한 명이 위독해서 죽기 전에 소원이었던 것을 친구 둘이 옆에서 들어주는 내용이었다.

그 소원이라는 것이 들어주기엔 너무 민망한 것들의 연속이었다. 멜로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처럼 해보고 싶었던 것인데, 친구는 가발을 뒤집어 써야 했고, 콧소리를 내면서 비위를 맞춰줘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정 비위가 상해서 못하겠다고 돌아서면, 금방 숨이라도 넘어갈 듯 기침을 해대면서 사정을 해대는 통에, 또다시 친구들은 ‘까짓것 해주자’라며 끝까지 참으며 친구의 터무니없는 부탁을 계속 들어준다. 심지어 비련의 여주인공 흉내로 친구와 키스 장면까지 연출하면서 말이다.

 

‘까짓것 해주자’는 말이 일상이 된 사회

관중들의 뜨거운 호응과 박수 갈채가 쏟아지며 그 무대는 마무리 되었지만, 씁쓸한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건 막돼먹은 친구들 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현실의 모습이었다. 집에서도 일어나는 일이었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물론 직장 사회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장면들이었다. 아닌 것을 알지만 들어주자는 억지가 드물지 않다.

최근에 인터넷을 하다 보면 주인의식에 대한 글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유명한 방송인이자 식음료업체의 CEO가 강의 중에 한 말이라며, ‘주인도 아닌 직원에게 주인의식을 가지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획으로 내용을 담은 모 언론사의 대표가 한 말이 인상 깊다. “주인의식을 가지라고 말하는 것은 소용없다. 주인이 되게 해줘야 한다.’ 주인이 된다는 것은 ‘회사를 소유할 수 있는 권리, 이익을 분배 받을 수 있는 권리, 정보를 공유 받을 수 있는 권리,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언론사는 독특한 기업 모델을 유지하고 있다. 1년이상 근무하면 주식을 살 권리가 부여된단다. 현재 주식의 90%가 임직원 소유이며, 10%가 대표이사가 보유 중이다. 직원평의회를 통해 직원들의 의견을 조직 운영에 반영하고, 주요 의사 결정에도 참여할 수 있게 한단다. 요즘 같은 현실에서 이렇게나마 운영하고 있다는 데에 부러운 맘 금할 수 없고 지지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렇게 한다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실천하고 있는 기업들은 주위에 적지 않은 듯 하다.

주인이 아닌데 주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것은 모순이다. 어느 것 하나 내 것이 없는데, 내 것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라는 말인데, 그게 말처럼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체제와 이념에 대해 배운 내용 중에서 사람들이 공동으로 경작하는 농장과 개별적으로 일구는 텃밭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루 종일 나와서 일하는 공동농장의 작물들을 수확이 그저 그랬는데, 새벽과 밤에 잠깐 돌볼 수 밖에 없는 개인 텃밭의 작물은 튼실하고 열매도 실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개인 텃밭을 가꾸는 마음으로 협동농장에서도 일하도록 지도해도 성과로 이어질 리가 만무했다. 결국 그 체제는 망했다.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하고 주는 대로 받아 가라’고 하는 게 직장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겠지만, 50대의 아재급 연배들은 직장에 대한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한번 몸 담았으면, 조직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충성을 다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나를 거두어 주었으니 그 담에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회사를 위해 바친다는 것이었다.

회사를 위한다는 맘이었지만 사실 상사 모시기였다. 이삿짐을 나르고 김장할 때 도와주고 아이들 과외까지 신경 쓰고 때가 되면 선물 보따리 싸 들고 인사도 다녔다. 내가 과장이면 내 아이는 과장 아이였고, 이웃의 부장집 아이들은 부장 아이였다. 내가 부장에게 깍듯하게 대하듯 내 아이도 부장 아이에게 조아리기 일쑤였다.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우스운 현실을 당시엔 무겁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내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해 수술이 있어도 부장 아이의 감기에 더 신경을 써야 했던 시절이었다.

 

샐러리맨십에서 나아가 체어맨십으로

흔히 직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회사가 요구하는 발전이나 변화를 거부하고 받아들이기를 싫어한다고들 단언한다. 주도적으로 나서지 않고 시키는 일도 겨우 하는 사람들이라고 평가 절하하기 일쑤다. 그래서 자리만 지키고 앉아서 월급만 축내는 사람들이라고 지적질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뭔가 나서서 열심히 하기 보다 눈 앞에 떨어진 일이나 겨우 처리할 뿐이라고 답답해 한다.

직원이 변화하기 싫은 것이라기 보다는 또 이러다가 말겠지 하기 때문에 심드렁하게 반응할 뿐이다. 직장생활 오해 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큰 일이 있지 않아도 수시로 자리가 바뀐다. 조직 개편이 되거나 구조조정이 되거나 인사이동이 있거나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조직이 심기일전 하기 위해서 책상을 이리저리 옮긴다.

정해진 자리가 없는 직장에서 근무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늘상 옮겨야 하는 직장인들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가? 세상 싫은 얼굴들이다. 이제 겨우 자리에 익숙해지고 공간에 적응할만하면 여지 없이 또 다른 공간으로 집어 넣어서 불안정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자리에 대해 애정을 갖지 않는다. 조만간 또 옮길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자리만 옮기는 것이 아니라 회사의 생각이라는 것도 그때 그때 달라서 어제는 이런 구호를 외치다가 오늘은 다른 구호를 외워야 한다.

예전에 대학을 졸업하고 영상제작 동아리 활동을 꽤나 열심히 했었다. 아르바이트로 모은 쌈짓돈을 투자금으로 박아 넣고 복학생들로 구성된 모임이었다. 영상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료 화면으로 쓸만한 것들을 미리 준비해둬야 했었는데, 일출영상을 찍기로 했다. 찾아간 곳은 동해 쪽으로 톡 튀어나온 지형적 특성 때문에 호미곶 해안이었다.

쌈짓돈 투자금으로 산 덜덜거리는 똥차를 몰고 자정 넘어 부산에서 출발했는데, 네비게이션도 없었고 초행길이었다. 무작정 해안길 따라 달렸는데, 인적이 끊어진 국도변에서 그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가다가 유턴을 하고 또 조금 가다가 의심스러운 마음에 유턴을 했다. 하여간 유턴만 계속하며 뱅뱅 돌기만 했는데, 길 찾기는 더 어려웠다. 새벽 두어시 무렵에 이미 근처에 도착은 했지만 끄트머리 해안을 찾던 우리는 귀신에라도 홀린 듯 추운 겨울밤을 그렇게 유턴으로 뱅뱅 돌았다. 동트기 직전에야 도착할 수 있었는데, 정작 구름이 끼어서 제대로 된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 위치를 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유턴을 하지 않고 쭉 가 보는 것이었다. 북상하는 국도에서는 달이 오른쪽에 있었는데, 꺾어지는 길을 지난 뒤에는 달이 왼쪽에 있었다. 그 지점이 호미곶이었는데, 거기까지 가지도 않은 채 뺑뺑이만 돌아댔던 것이다. 한번 끝까지 가보기는 하자는 마음으로 달리다 보니 의외로 쉽게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뭔가를 시작해 놓고는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섣불리 방향을 바꿔버린다. 가 봐야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있는데, 미리부터 엉터리 판단을 하고 엉터리 챗바퀴를 도는 조직이 많다. 사실 결론은 싫어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심각하고 간절한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몰라서 그러는 것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생각을 공유하겠다는 생각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해프닝의 연속일 뿐이다. 반복되다 보면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기계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최선을 다해서 일하라는 주문에 직원들은 받는 만큼 하겠다는 샐러리맨십으로 무장하고 있다. 받는 만큼 일하는 것이 법적으로야 맞지만 얼마를 받든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래서 쥐꼬리만큼 받더라도 주인의식으로 무장해서 모든 것을 하라는 것인데, 이런 생각들이 시대가 가면 갈수록 힘을 잃어간다. 주인도 아닌 사람에게 주인행색을 하라는 말보다, 한 만큼 거둔다는 사장의식을 심어줘야 할 필요가 있다. 사장의식이라는 단어보다는 좀 더 고급지게 체어맨십으로 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