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년 된 인쇄 사업을 하는 기업이 경영 악화로 문을 닫는다는 기사가 최근 있었습니다.

1912년 창업해서 4대 후손이 운영하는, 현재 국내 인쇄 기업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보진재(寶晉齋)가 인쇄업 불황을 견디지 못하고 인쇄업에서 철수한다는 겁니다.

중국 등 해외의 저가 인쇄 물량과 경쟁에 밀리고, 전자책이 유행하며 종이책이 퇴조하는

시류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글 습자본 같은 계몽 성격의 책이나, 문장, 청년 같은 일제 시대의 잡지, 70년대의 대학 예비고사 시험지, 전 세계 성경의 30프로 가까이를 인쇄하는 등 우리나라 근대 인쇄문화의 역사를 고스란히 대변하던 회사였습니다. 우리 국민 중 많은 분들이

일정 부분 신세를 졌다고 할까요? 이 오래된 인쇄 기업의 퇴장을 보는 마음이 남다릅니다.

제지산업에 34년 여간 종사한 사람으로서 규모가 크거나 역사가 오래된 인쇄 기업들은 거의 다 알았습니다. 그중에 콘텐츠를 다루는 출판사보다 더 출판(?)스러운, 운치 있는 이름을 가진 공업적 성격의 인쇄 기업 ‘보진재’는 더 잘 알고 있었지요. '보진재'라는 이름은

창업주가 흠모하던 북송(北宋)의 서화가 미불(米芾)의 서재 이름에서 따왔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해주던 후손 경영자의 얼굴이 기억납니다.

한 시대가 가는 것을 극명하게 말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하기까지 합니다.

생각이 이어집니다.

주변에 종이 신문을 보는 사람이나 종이 책을 읽는 사람이 눈에 띄게 줄어가는 것 같습니다.

제지산업에 아직 관련을 맺고 있는 지인에게 들으니 현재의 톤당(ton, 천 키로그램) 신문용지

가격이 10년 전의 신문용지 가격보다 오만원이 싸졌다는 겁니다.

수요 감퇴 외에는 뭐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현실을 말해주는 것이겠지요.

모든 사업이나 업종이 그렇겠지만, 종이 산업도 많은 부침과 변화가 있어왔습니다.

신문을 보고, 책을 읽는 데 쓰는 신문용지, 출판용지 쪽은 급격히 줄고,

닦고, 싸매는 용도의 화장지나 포장지 분야는 날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 기사를 보니 미국에서는 동네 책방이 제 역할을 하며 종이 출판이 작년 대비 늘어났다고 전하며 종이책의 미덕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종이책, 종이 신문, 종이 잡지 등이 결국 사양화되어가는 큰 흐름은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유감스럽게도 하염없이 들었습니다.

금년 1월에 168년 역사의 권위 있는 미국의 신문 뉴욕 타임즈가 ‘진실’이라 적힌 티셔츠를

판매한 것을 두고도 말들이 많았습니다. 해당 신문으로서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진실을

티셔츠, 토트백, 브로치 같은 상품에 진실을 적어 넣어, 이들을 입고, 들고, 달고 보면서

진실의 가치를 상징적으로 알리는 재치에 무게를 두었겠지요. 망해가는 신문이라는 트럼프의 공격에 진실이라는 것으로 멋지게 반격한 것으로도 생각되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이나 책을 안 읽을 이유들이 차고 넘쳐나는 이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몸짓으로 읽히는 것은 왜일까요?

모든 게 한 방향으로 너무 빨리 변하는 우리 사회 속에서 종이와 관련된 산업이 얼마나 또

어떻게 변모를 이룰지 가늠이 어렵습니다. 비즈니스 책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읽은 글이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지혜는 늘 아래로 흘러갔다. 그런데 이제 지혜가 양방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바로 여기에 단서가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