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조국 전 민정수석을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한 이래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는 ‘조국 사태’는 시간이 흐를수록 단순한 정치적 논쟁거리가 아닌 우리 사회 전반의 모든 이슈를 집어 삼키는 블랙홀이 되고 있다. 특히 이번 일과 관련해서는 조 장관의 모교이자 조 장관이 교수로 재직 중인 서울대를 비롯해 조 장관 딸의 모교인 고려대, 부산대 등 대학가 청년들이 조 장관 사퇴를 촉구하는 촛불집회를 여는 등 여론을 주도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는 ‘요즘 것들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으며 오로지 자기만 안다’던 청년들에 대한 기존의 사회적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올 상반기 내내 베스트셀러 순위권을 지켜온 책 <90년생이 온다>는 이 같은 청년들의 성향을 90년생이 갖는 특징 중 하나인 ‘정직함’이라 표현한 바 있다. 90년생을 ‘간단하고 재미있는 것을 좋아하는 개성 강한 존재’로 정의내린 이 책은 또 한편으로는 90년생을 ‘자신이 솔직하고 정직한 만큼 남들도 그러하기를 바라고,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분야에서 완전무결한 정직을 요구하며, 학종과 깜깜이 면접에 분노하는 세대’로 보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대한민국 유복한 가정의 외동아들, 외동딸로 태어났지만, 1997년 IMF시대와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라는 열악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낙타가 된 상태에서 바늘구멍 같은 좁은 취업문을 뚫어야 한다는 전쟁과도 같은 강박관념”으로 그 어느 세대보다도 치열하고 경쟁적인 삶을 살았던 이들에게 ‘공정하지 못한 시스템’이란 자신이 모든 것을 바쳐 기울인 노력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기에 반드시 척결해야 할 대상인 셈이다. 만약 이처럼 정의롭고 합리적이며 공정의 가치를 중시하는 90년생이 새로운 주인공으로 우리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면 지금껏 우리 사회의 고질과도 같았던 혈연, 지연, 학연으로 점철된 불공정의 적폐도 분명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90년생이 온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아직 우리 사회 어느 곳에도 90년생을 위한 자리는 없다. 다만, 건국 50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경제성장과 민주화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은 세계 유일무이한 국가답게 이미 중년의 나이를 훌쩍 넘긴 ‘국제시장’세대로 불릴만한 산업화 세력과 ‘1987’세대로 불릴만한 민주화 세력이 아직도 그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미 오랜 시간 기득권을 누린 그들이 적대적 공생을 통해 구축한 불공정한 사회 구조는 최근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 결과 한국사회에서의 성공요인으로 90년대생들이 ‘노력’(36.9) 대신 ‘부유한 집안’(55.6)을 선택하는 체념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어느 세대보다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꿈꾸었지만, 어느 세대보다 정의롭지 못하고 불공정한 사회 속에서 절망하는 것이 지금의 90년생이 겪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고, 시간이 흐르면 역사의 주인공도 바뀌기 마련이다. 그러나 주인공의 너무 늦은 등장은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지 못한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90년생이 새로운 이야기를 쓸 수 있도록 이제라도 기성세대들은 주인공의 자리를 내어줘야 하지 않을까? 90년생이 쓸 2019년 대한민국의 새로운 이야기는 과연 어떠할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