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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학의 직장에서 살아남기] 정답이 있다고, 우기지 좀 말자
   

우리는 어른들이 내준 문제에 답을 찾아가며 커왔다. 입에서 비로소 ‘말’이라는 것을 하게 된 이후 훅 들어온 첫 질문,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물론 둘 중에 어느 하나를 택해도 불이익은 없었다. 그저 나의 ‘소리’를 기대했을 뿐이다.

시간이 흘러 학교에 가면서 이제 선생님이 내는 문제에 답을 해야했다. 이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당시에는 물론 이해가 안되는 것 투성이였지만,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선생님이 ‘시키는 데로, 알려주는 데로, 하라는 데로’ 하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난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학교에서는 그렇게 속칭 ‘모범생’은 아니었다.

그렇게 흘러 흘러 대학이라는 곳에 가니, 갑자기 ‘생각 또는 의견’을 묻기 시작했다. 사실은 무엇이고, 그 사실을 우리가 어떤 기준 및 가치에 의해 판단해야 하는지, 시대, 대중, 교수님 등이 바라는 답이 각각 다를 텐데… 무엇을 기준으로 정답에 가까운 무언가를 말해야 할지 몰라서 늘 갈팡질팡이었다.

그렇게 회사에 가고, 일을 택한 철학적 배경없이 그저 내 수준에 가장 높은 대우(연봉)를 하는 곳을 선택하고, 영혼없이 일을 하던 와중에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지금 하는 일의 ‘정답’이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고, 무엇을 통해 정답 임을 증명해야 하는 것일까,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 딜레마에 빠졌다. 그 전에는 자신 있게 ‘정답’이라고 이야기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기준 없이 그저 그때마다 다른 대답을 하게 됨을 알고 난 이후, 개인적으로 ‘정답’을 잃어버렸다. 아니 정답의 무의미함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정답이 아닌 정답’을 찾아 수년을 헤맸던 것 같다. 물론 당장 눈 앞의 문제에 대한 정답은 낼 수 있었다. 나의 문제가 곧 조직의 문제였고, 조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혹은 해야만 하는 것을 찾아 그저 묵묵히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곧 ‘정답에 가까운 무언가’가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봉착하면, 그와 관련하여 먼저 경험한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무엇이 현 시점에서 옳은 선택이고, 정답인지 말이다. 그들은 친절하게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더욱 나은지 이야기해주었다.

하지만, 결정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분명 학창시절에는 선택 즉시 ‘정답 여부’를 알 수 있었다. 인생도 회사도 그러면 참 좋겠지만, 하나도 그런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한참 지난 후에 정답 여부를 알 수 있었고, 그 답이 매번 비슷한 문제에 같은 답으로 내서는 안되는 이상한 문제들 투성이었다.

   

그리고, 그 정답을 찾아 십 수년을 헤맨 결과, 정답 그 자체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대신에, 정답을 만들거나, 증명하는 사람은 있다. 정답을 가진 이가 있고, 그가 매번 정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정도만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100% 모두에게 통할 수 있는 정답은 있을 수 없고, 매번 정답을 증명하는 사람 또한 있을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최근 이러한 ‘정답의 원리(Principle)’를 깨달은 이후, 연차에 관계없이 아래와 같은 코칭을 주로 한다. “조직내 누구도 정답이 없기 때문에, 조직내 어느 누구에도 쫄 필요 없다고 말이다.” 물론, 사장은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녀)는 정답을 알고 있기 보다는 정답을 고를 만한 권한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 더욱 합리적 추론에 가깝다.

따라서, 정답 그 자체 보다, 정답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그 정답이 또 다른 문제 또는 해답을 불러오는 구조에 더 큰 의미가 있다. 그것이 현 수준 보다 긍정적으로 간다고 볼 때,

우리는 커뮤니케이션만큼은 상/하위 관계없이 편하게 보다 정답에 가까운 어떤 결과물을 위해 보다 합리적인 협의의 과정을 거치려고 하는 것이고, 그래야만 보다 그 정답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더 큰 힘을 받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정답이 없다’라는 것을 모두가 함께 인정하고, 그에 대한 충분한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정답에 가까운 어떤 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편견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누군가 자신의 의견이 ‘정답’이라고 우기는 순간, 그 모든 것이 혼돈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기 때문에,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규칙을 만들어 운용이 필요하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비로소 모두가 함께 정답을 찾기 위한 수평적 소통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 보다 합리적 사고를 키울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지고, 조직과 개인 모두가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만들어진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부장, 차장, 과정 등등 최소한 10년 이상의 경력이 있는 분들의 연륜과 노하우도 좋지만, 그것이 현 시장 환경 또는 변화된 고객의 니즈에 맞지 않음에도 그저 온고지신의 정신으로 옛 것만을 강조한다면, 그저 파국이다. 자신도 모르게, 하는 과거와 많이 닮아있는 크고 작은 의사결정이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애써 외면한다. 왜? 변화가 싫기 때문이다.

‘정답은 없다’라는 아주 간단한 개념 임에도 쉽게 바꾸기 어렵다. 이제는 옛 정답이 정답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시대가 왔음에도, 과거 정답을 현재에도 우긴다. 그것도 나이, 경력, 노하우 등을 이용하여 말하는 이를 과연 어떻게 이길지 미지수이다. 그나마 ‘책임’이라도 확실하게 짊어진다면 다행이다. 그것도 없이, 소위 양심없이 일하는 어른(?)들에게 젊은이들이 너무 데이고 있는 것은 아닐지 가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대화를 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들이 과연 ‘정답만을 좇고 있는지, 정답을 만들기 위한 시스템을 단단하게 만들고 있는지’ 말이다. 그래서, 정답을 말하는 이가 무섭다. 단정짓고, 단죄하고, 그들의 단호한 태도로부터 단말마의 비명이 나오지나 않을까 싶다.

김영학 이직스쿨 대표  |  careerstyling@gmail.com  |  승인 2019.09.11  15:2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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