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학생 때, 바둑 두는 것을 좋아했다. 처음부터 바둑을 좋아했던 건 아니다. 먼저 장기부터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네 어른들을 모두 이기고 나니, 상대할 사람이 없어져서 흥미가 떨어졌다.

그래서 좀 더 복잡한 게임을 해보고 싶었다. 우연히 사촌 형이 바둑 두는 걸 곁에서 보다가 변수가 많은 바둑이 훨씬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 뒤부터 바둑을 꽤 열심히 뒀다. 최소한 2급 수준까지는 그랬다. 바둑 역시 주변에 상대할 사람이 없어지자 접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바둑을 계속 둘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바둑으로 먹고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둑을 두면 어른들이 “게을러 터졌다”고 야단치기도 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바둑은 수입 좋은 직업으로 거듭났다. 똑같은 게임인데 시대에 따라 그 가치가 바뀐 것이다.

여기서 나는 두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첫째, ‘재미라는 것은 상대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좀 다르게 표현하면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경쟁을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생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삶이 무의미하다. 우리의 삶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경쟁은 늘 승자와 패자를 가른다. 그렇다면 승자는 왜 승자이며, 패자는 왜 패했을까? 승자가 갖는 두 가지 다른 점 때문이다. 그 하나는 선천적 지능이며, 다른 하나는 노력이다. 여기서 선천적 지능은 타고난 것이어서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불평등은 시작된 셈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선천적 지능을 가진 사람 이상으로 노력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

두 번째는 ‘동일한 역할이라 할지라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가치가 변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내가 바둑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던 그 시절에도 바둑으로 먹고 살 수 있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바둑기사로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언급한대로 그 시절에는 바둑이 돈벌이 수단이 되지는 않았다.

즉 ‘시대적 유용성’이 불평등을 가르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언급한 바와 같이 중학교 때 이미 상당한 수준까지 뒀으니, 그게 돈벌이가 됐다면 다른 일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또 다른 재미를 느낄만한 일을 찾기 위한 피나는 고생은 덜했을 것이다. 그 고생하는 기간은 불평등한 조건이었으므로.

유용성은 비단 ‘시대’에만 있는 건 아니다. 지역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기도 한다. 예컨대, 한국에서는 씨름을 해도 먹고 살지만 미국에서는 씨름해서 돈 벌기가 어렵다. 반대로 미국에서는 풋볼(football)선수가 억만장자가 될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어렵다. 즉 불평등의 원인은 지역적 유용성에서도 존재한다.

앞서 불평등에 대한 원초적 문제를 내 나름대로 짚어봤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진정한 불평등의 원인이 되지 못한다.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불평등의 심각성은 ‘규칙의 불공정한 적용’에 있다고 생각한다.

규칙은 ‘다함께 지켜야 할 원칙’이다. 다시 말해서 ‘그 시대에 최적화된 원칙’이다. 규칙에는 늘 예외가 있지만 다수가 공감하면 예외는 받아들여야 한다. 부득이한 예외는 규칙에 공감하는 다수가 포용하는 방법을 찾으면 해결된다.

하지만 규칙을 불공정하게 적용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사회악이다. 마라톤이 승마보다 더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마라톤에는 불공평이 끼어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즉 승마는 말의 능력에 상당부분 좌우되는 귀족 스포츠인 반면에 마라톤은 온전한 ‘능력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러한 규칙들이 통용되는 이유는 이 모든 행위들이 ‘스스로’ 이루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이 대신해 주지 않는 전제가 깔린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스스로가 아니라 부모에 의해 그 능력이 부풀려지는 병리들이 끼어들고 있다.

마라토너 아들에게 감독인 아버지가 중간에 자전거에 태워서 1등을 시켜주는 것과 같은 행위들이다. 이러한 행위는 시대적 규칙을 파괴하는 행위이며, 나머지 마라토너들에게 심각한 정신적 후유증을 안겨준다. 한 사람의 안위를 위해 절대다수의 정신을 갉아먹는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또 하나는 ‘선택받을 권리의 침해’다. 소시절 운동회 때, 순서대로 6~7명씩 출발선에 서서 달리기 경주를 하면 규칙에 의해 우열이 가려진다. 당시 꼴등한 학생이 불공평하다고 선생님에게 대드는 일은 없었다. 동일한 선에서 출발하게 했기 때문이다.

만일 학교에 기부를 많이 한 어린이나, 교사 자녀에게 몇 미터 앞에서 뛰게 했다면 어땠을까? 절대 다수가 공정하지 않다고 반발할 것이고, 다음부터는 운동회에 참여하지도 않을 것이다. 경쟁에 정당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교육은 부정되고 공동체 의식은 파괴될 수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사회악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드러내지는 않겠지만 트릭과 편법을 알고 있는 부모가 부족한 자식을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테니까. 초등학생 자녀의 숙제를 대신해주고, 과제물을 챙겨주는 부모가 없어지지 않는 한.

다행히도 이러한 불평등을 비켜갈 방법이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다. 다가올 미래는 다양성의 사회여서다. 일렬종대로 서서 선택받아야 하는 규칙사회에서, 어디에든 깃발을 꽂고 횡대로 설 수 있는 자가발전 시대가 왔다. 다양성의 사회에서는 돈과 권력이 절대가치가 아닐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러한 조건의 완성은 ‘태도’에 있다. 태도의 또 다른 표현으로는 사회적 가치 지향성이며 좀 어렵게 표현하면 ‘윤리적 자의성’이다. 자신의 신념이 윤리에 기반해야 한다는 뜻이다. 일렬종대로 서서 1등을 하든, 횡대로 서서 깃발을 꽂든 간에 태도는 절대적 사회자산이 될 것이며 사회적 평판의 기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