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런 버핏은 오랫 동안 자신의 의무는 장기간에 걸친 소유주들에 대한 의무라고 말해 왔다.   출처= Flickr

[이코노믹리뷰=홍석윤 기자] 기업 CEO들의 모임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Business Roundtable)이 지난 달 “기업 목적을 기존 주주 이익 극대화에서 고객, 직원, 커뮤니티 등 모든 이해당사자의 번영 극대화로 바꿔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매사추세츠주 뉴베드포드(New Bedford)의 코브街(Cove Street)에 있었던 버크셔 해서웨이(Berkshire Hathaway) 공장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섬유는 뉴잉글랜드(New England - 메인, 뉴햄프셔, 버몬트,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의 6개 주를 포함하는 미국 북동부 지역)에서 가장 큰 산업이었다. 거의 모든 수로에는 붉은 벽돌의 굴뚝이 우뚝 솟아 있었고, 그 중 버크셔는 가장 큰 생산자였다.

버크셔의 전성기에는 가동하는 공장이 14개나 됐고 1만 2000여 명의 노동자를 고용했다. 그러나 섬유산업은 급속히 쇠퇴했다. 1962년 민간인 투자전문가 워렌 버핏이라는 사람이 버크셔에 투자를 했는데, 1965년 회사 실적이 부진하자 기존 경영진을 몰아내고 회사를 인수했다.

그때까지 버크셔의 유일한 중요한 자산은 뉴베드포드에 있는 공장이었는데, 이 공장은 이 지역에서 가장 큰 공장으로 지역 내 최대 고용주였다. 버핏은 켄 체이스라는 관리자를 고용하고 그에게 재고, 고정자산, 수취채권을 감축해 자본 지출을 줄이라고 지시했다.

당시 34세였던 버핏은 체이스에게 "돈을 담아 둘 다른 곳은 얼마든지 있다"고 말했다.

버핏은 단기적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소유주들에게 가장 높은 수익을 제공하기 위해 자본을 할당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공장이 지역사회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장을 폐쇄하지는 않았지만, 버핏은 체이스와 그의 후임자까지 나서 섬유에 재투자해 달라는 요청을 계속 거부했다. 결국 그 공장이 지속적인 손실을 피할 수 없게 되자 버핏은 1985년에 공장 문을 닫았다. 그는 자신의 결정을 자비로운 자본주의의 표현이라고 정당화했다. 그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그는 칼 마르크스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순수한 아담 스미스주의자도 아니었다.

공장 문을 닫는 것은 뉴베드포드 지역사회에서는 끔찍한 일이었다. 일자리를 잃은 400명의 직원들과 회사에 물건을 공급해온 납품업자들에게 커다란 고통이었다. 흔히 있는 이야기다.

버핏이 지난 달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의 결정에 대해 드러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그 결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가 공장 문을 닫은 후, 20년 동안 버크셔는 보험, 미디어, 사탕, 가구, 주식 투자 포트폴리오 등으로 다양해졌고 버크셔의 주가는 190배 뛰었다. 그러나 당시 버크셔의 섬유 사업 경쟁자였던 벌링턴 인더스트리(Burlington Industries)의 주가는 같은 기간 거의 그대로였다. 버핏은 그것을 ‘많은 두뇌와 에너지가 잘못된 전제에 적용된 경우’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후 버크셔의 주인들(주주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이득을 보았다. 재배치된 자본은 현재 38만 9000명의 직원을 보유하고 있는 약 75개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는 데 사용되었다. 섬유업은 사라졌지만 그 이후에도 버크셔의 사업은 여러 번 교체되었다. 38만 9000명의 직원들이 소비하고 경제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 상승 효과는 헤아릴 수 없다.

소유주들의 장기적 이익을 위해 자본을 이끄는 것이 사회에 최적이라고 믿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신뢰가 필요하다. 물론 투자자들도 확실히 실수를 한다. 그러나 긴 관점에서 자기 이익의 나침반은 번영의 방향을 가리킨다. 결국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의 선언은 그들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잘 운영된 자본주의는 소위 이해 당사자들에게도 이익이 되겠지만, 사실 이해 당사자의 이익이 자본주의의 목적은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스타벅스의 목적은 커피 마시는 사람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의 사업을 성공시키려는 욕구가 그렇게 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법적 의무가 없는 라운드테이블의 새로운 선언은, 한 세기 동안 미국 기업을 괴롭혀온 기업 소유자들과 고용된 사람들 사이의 갈등에서 나온 것이다.

오늘날 경영자들은 엄청난 권력을 위임받았다. 이와 같은 권위의 재편성은 한동안 널리 칭찬받았다. 현대식 경영자들은 소유주에 비해 전문적이고 과학적이라고 칭송받았다.

그러나 1970년대에 월가는 그런 미국 회사들이 자기 만족과 게으름을 부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경영자들은 관료적이 되었고 그들의 영역을 강화하는데 집중했다. 소유권, 즉 자본의 목소리는 배제되었다.

사업이 더 잘 되려면 경영자들은 기업가적 정신을 보다 더 발휘해야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한 다발의 스톡옵션이 주어졌다. 그러나 스톡옵션은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의 일부 최고 경영진들에 의해 터무니없이 남용되었다.

라운드테이블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경영자들을 더 확고하게 안장에 앉힐 것이다. 최고경영자들은 회사의 전략을 세우는데 그치지 않고 회사의 목적까지 왜곡시키고 있다.

일부 CEO들은 이러한 입장을 옹호하면서 직원들에게 양질의 급여를 지급하고 좋은 기업 시민이 되는 것이 주주들에게도 장기적으로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주주들도 주주의 이익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는 라운드테이블은 원하지 않는다. 고객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고객도 없어질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주주 이익의 동기와 사회적 선행이 상충되는 경우, 라운드테이블의 선언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예를 들어 두 개의 철강회사는 오염을 덜 발생하기 위한 어떤 경쟁도 하지 않을 것이다. 시장에서는 그에 대해 보상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사회적 이익을 구현하는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

기업의 사명은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다. 물론 법, 품위, 그리고 바라건대 지혜의 범위 안에서 말이다. 라운드테이블은 정치적 보호막으로 이 임무를 왜곡하고 있다. 그들은 몸을 사리고 있을 뿐이다.

CEO들은 이미 미국에서 가장 고집이 세고 과다한 보수를 받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했지만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수백만 달러를 벌면서 소유의 윤리를 조롱해왔다. 많은 경영자들이 자기 돈 들이지 않고 공짜 옵션을 누려왔다. 그들이 자본주의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주주 모델은 소위 단기 성과라는 병 때문에 완벽하지는 않다. 그러나 조잡하고 탐욕스럽게 운영된 자본주의의 해결책은 거품같은 논리로 자본주의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더 잘 운용하는 것이다.

본 기사는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서 10여년간 금융 기자를 지냈고 워렌 버핏의 전기작가인 로저 로벤스타인(Roger Lowenstein)이 워싱턴포스트(WP)에 “A reexamination of ownership in the age of the public corporation” 제하로 게재한 기사를 옮긴 것이며 본지의 방향과는 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