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애플이 고객과 인공지능 비서 시리의 대화를 일부 녹음해 보관한 것으로 확인됐다. 개인정보보호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호언장담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다.

빅데이터 확보에 열을 올리던 다른 기업들을 탐욕스러운 기업으로 묘사하던 애플이 뒤로는 '도청 전문가' 시리를 키우고 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애플은 결국 사과했다.

도청 전문가 시리?

30일 업계 및 CNBC 등 외신에 따르면 애플은 최근까지 고객과 인공지능 비서 시리의 대화 일부를 녹음해 보관했다. 애플ID가 아닌 무작위로 고객의 목소리를 녹음해 저장했으며, 전체 대화내용의 0.2%가 애플의 서버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논란이 커지자 애플은 사과했다. 애플은 29일 블로그를 통해 “시리와의 대화를 녹음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그 대안으로 시리 개선 작업을 돕기 위해 컴퓨터로 처리된 녹취록을 사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애플은 고객과 시리의 대화가 외부업체 계약직원이 아닌 자사 직원들만 들을 수 있었다고 해명했다. 현재 시리 평가에 참여한 계약직 직원을 모두 해고했으며 추후 설정변경을 통해 목소리 녹음 원천차단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그 누구보다 사생활 보호에 집중하고 있다는 애플이 시리와 고객의 목소리를 녹음했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있다. 지금까지 애플은 사생활 보호에 있어 자타가 공인하는 ‘철벽기업’으로 명성이 높기 때문이다.

2015년 벌어진 아이폰 잠금해제 논란이 대표적이다.

이탈리아 건축가인 레오나르도 파브레티(Leonardo Fabbretti)는 2007년 부인과 함께 봉사활동을 하던 중 에티오피아에서 다마(Dama)를 입양해 아들로 키웠으나, 다마는 2015년 골수암으로 사망했다. 이후 파브레티는 아들의 아이폰에 담긴 추억을 확인하려고 애플에 잠금번호를 해제해달라는 요청을 했으나, 애플은 이를 거절했다. 고객의 사생활 보호가 최우선 가치라는 대의명분 때문이다.

당시 파브레티는 <이코노믹리뷰>와의 온라인 인터뷰에서 “나는 10년이 된 노키아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으며 내 최대 실수는 아들에게 아이폰을 사준 것(My great error was buy an I-phone to my son!!!!)”이라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애플은 FBI가 범죄 용의자의 혐의를 특정하기 위해 아이폰 잠금을 해제해달라고 요청해도 이를 묵살한 바 있다. 실제로 FBI는 지난 2015년 12월에 캘리포니아 주 샌버너디노 총기 테러범의 '아이폰 5c' 잠금해제를 위해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으며 법원은 수사당국에 협조하라고 애플에 명령까지 내렸지만, 애플은 개인 정보 보호 등의 이유로 거절했다.

당시 공방은 미 법무부가 애플의 도움 없이 민간업체의 도움으로 아이폰의 데이터에 접근하는 데 성공하면서 일단락됐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당시 “수사당국이 아이폰 잠금해제를 요구하는 것은 수사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면서 “이는 시민의 자유를 위협에 빠트리는 위험한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2017년에는 미국 텍사스에서 벌어진 총기난사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수사당국이 애플에 아이폰 잠금해제를 요청하기도 했으나, 역시 거절당하기도 했다.

애플은 이후 고객의 사용자 정보를 과도하게 확보하려는 기업들을 거대 군산복합체로 부르며 비판하기도 했다. 실제로 지난해 10월 팀 쿡 CEO는 유럽에서 “매일 고객이 클릭하는 선호도와 관련된 데이터가 수십억 달러에 거래되는 것이 현실"이라면서 개인정보를 이용해 광고를 파는 사업은 '데이터 산업 콤플렉스'로 커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들을 '데이터산업복합체(Data-Industrial Complex)'로 부르며 탐욕스러운 거대 군산복합체에 비유하기도 했다. 나아가 유럽연합의 일반정보보호규정(GDPR)을 극찬하기도 했다.

애플은 당시 미국에서 프라이버시 포털을 공개하기도 했다. 고객이 애플 기기를 사용하면서 입력한 개인정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확인할 수 있는 포털이다. GDPR에 따라 유럽에서만 가동되던 것이 미국에도 서비스되기 시작했다. 이 역시 애플의 개인정보보호에 대한 접근방식을 잘 보여준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러나 이번 시리 논란으로 애플의 사생활 보호 의지는 '속 빈 강정'이 됐다.

▲ 파브레티 씨가 본지와 인터뷰한 후 소감을 밝히고 있다. 출처=갈무리

“다른 인공지능도 피할 수 없는 문제”

모바일 시대를 넘어 초연결 사물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ICT 기업들은 개인정보취급과 관련된 논란에 종종 휘말리고 있다. 방대한 데이터를 확보해야 인공지능 기술력을 통한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이 비슷한 논란에 휘말린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 14일(현지시간) 블룸버그는 페이스북의 수백명의 외주직원을 고용, 확보되는 고객의 목소리를 받아 적게 했다고 보도했다. 페이스북 내부에서 작동되는 인공지능이 실제 대화내용을 파악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테스트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고객의 대화를 무단으로 엿들었다는 점에서 사생활 침해 논란이 커졌고, 결국 페이스북은 사과했다. 지난해 초유의 개인정보유출 파문을 일으킨 페이스북이라 특히 비판의 목소리가 컸다.

구글도 마찬가지다. 지난 7월 인공지능 구글 어시스턴트를 통해 녹음된 고객의 녹취파일 1000여개가 유출되며 상당한 논란에 휘말렸다. 구글은 녹취파일 유출 경로를 조사하는 한편 유출 혐의를 받고있는 직원을 중징계하고 사과했다. 아마존 알렉사도 비슷한 논란에 휘말려 엄청난 비판을 받기도 했다.

ICT 기업 입장에서는 방대한 빅데이터를 원하고 있으나, 고객 입장에서는 사생활을 지키고 싶어하는 입장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 논란은 계속될 조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