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 쫓다 지붕 쳐다 보는 개도 개 나름이다.

페이스북을 하다가 희한한 동영상 하나를 봤다. 닭과 개의 싸움이었다. 다리가 둘 뿐인 닭은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모둠발로 뜀뛰기를 해 가면서 두 다리와 부리를 사용해서 개를 향해 공격하고 방어했다. 개는 굳건한 네 다리를 가지고 있고, 사나운 이빨과 함께 큰 소리로 짖어댈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뒷다리로 버티면서 앞발로 공격을 하기에 유리했다.

처음 동영상을 봤을 때는 이 싸움은 불을 보듯 뻔할 거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기막힌 반전이 전개됐다. 닭은 목숨이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잠시 궁지에 몰리기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부리와 두 다리로 지독하게 달려들었다. 어느덧 개가 전의를 상실하는 모습을 보였고, 급기야는 줄행랑을 쳐 버렸다. 아마도 시작 전에 사람들에게 이 두 마리의 동물 싸움에 돈을 걸라고 했으면 백이면 백 개에다가 걸었을 것이다.

뻔해 보이지만 결코 뻔하지 않는 것들이 많은 세상이다. 똑똑해서 구구절절 말 하지 않아도 알아서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과 멍청해서 시킨 일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있다. 과연 조직에서 누가 살아 남을까? 어느 날 몇몇 사업체를 경영하는 지인이 식사 자리에서 내 뱉은 말이다. 너무 뻔한 얘기라 코웃음을 치면서 대답을 회피했다. 실은 답이 너무 뻔해 보이는 것이 오히려 함정일 듯 하여 대답하기가 망설여졌다.

 

일 잘하는 사람 vs. 자기 생각이 없는 사람

잠시 나를 쳐다보고서는 말을 이어갔다. 일 잘하는 사람은 시키지 않아도 해야 할 일들을 찾아서 척척 해낸다. 그는 하는 일과 관련해서는 CEO와 대화를 나눌 때에도 자기 주장을 잘 굽히지 않고 똑 부러지게 얘기하기 마련이다. 반면에 후자의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하는 일 마다 답답하게 처리하고, 스스로 뭘 찾아서 잘 할 줄도 모른다. 하지만 시키는 일은 잽싸게 처리하고, 무엇보다 상사인 자신과 대립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예스맨’이다.

그 말을 듣고 궁금증이 생겨서 질문을 하나 던졌다. “그러면 정말로 회사의 중요한 사활이 걸린 문제가 생겼을 땐 누구에게 시킵니까?” 은근히 내가 전자에 속한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전자에 유리한 질문이랍시고 던졌지만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그때 그때 달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잘 처리해야 될 문제가 아닙니까?”

“믿고 맡길 놈에게 시키게 되겠지.”

“멍청한 사람을 믿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지인은 육십대 초반이지만 젊어서부터 사업을 해와서, 산전수전은 물론 공중전 특별전까지 다 겪은 분이었다. 은연중에 내가 한 두 마디 얻어 듣는 것이, 상당히 도움이 되곤 했다. 그런데 돌아온 건 기대와는 다른 대답이었다. 일 잘 하는 사람들은 주장도 강한 법이어서 CEO에게 꼬치꼬치 따지고 어떨 때는 CEO의 의견보다 자기 주장을 더 강해서 불쾌하게 여겨질 때가 있단다. 그런 일이 자주 발생되다 보면 결국엔 ‘중이 절을 떠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직 경험이 많은 나였기에 그 말을 듣자,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사람은 다 똑 같기 마련이어서,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은 좋지만, 자신을 거역하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기에, 두 부류의 사람을 적절히 섞어서 쓸 수 밖에 없단다. 하지만 결국 옆에 두게 되는 사람은 주장을 굽히지 않고 대드는 사람인 경우는 잘 없다는 것이었다.

“아, 제가 그런 편인데요.”

“대체 왜 그러는데?”

“회사 일을 제 일이라 생각하고 가장 잘 하는 방법이라는 판단에 옳다고 생각되면 딱 부러지게 말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상대를 불쾌하게 하면서까지 그렇게 해야 될 이유가 있나?”

“언제든 의견을 말하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불쾌했을까요?”

“불쾌했을 거야.”

일을 똑 부러지게 잘 하고 인정 받는 비결이라고 생각한 것이 결국에는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들어 버린 셈이다. 그래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몇 번 들었던 말이 ‘그렇게 잘 났냐?’는 말이기도 했다. 지인이 말을 덧붙였다. ‘CEO는 쓰다 버릴 사람과 계속 함께 갈 사람을 구분하는 법이야.’ 그 말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이 후끈 달아올랐다.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답답함이 밀려왔다. 마치 고구마 백 개는 먹은 듯.

 

하락장에선 손 떼지 못하고, 상승장에서는 팔아 치워

범편호지민 부상십칙비하지 백칙외탄지 천칙역 만칙복 물지리야 (凡編戶之民 富相什則卑下之 伯則畏憚之 千則役 萬則僕 物之理也), 치욕적인 궁형을 당하고도 살아 남아 역사적 대작, 사기를 남긴 사마천이 《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 한 말이다. “대개 보통 사람들은 상대방의 부(富)가 자기보다 10배가 되면 그에게 욕을 하지만, 100배가 되면 그를 두려워하고 1000배가 되면 그의 밑에서 일을 하게 되고 10000배가 되면 그의 노예가 되는데 이것은 만물의 이치다”.

사마천이 살던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생각은 거의 변함없는 듯 하다. 그래서 중소기업을 운영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만만하게 훈수를 한다. 경영의 경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이렇게 하면 잘 될 것이라는 둥 저렇게 해보라는 둥 섣부른 판단을 내 놓는다. 하지만 그룹의 면모를 갖췄다고 하면 일종의 두려움을 가지게 되고,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나 워렌버핏 정도가 되면 신으로 추앙 받으며, 밥 먹는 자리나 얼굴 한번 볼 수 있는 기회만이라도 잡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된다.

10배의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는 왜 만만해 하는가? 그건 그 사람에 대해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심리다. 그 사람이 그렇게 된 것은 실력이 아니라 운이 작용했기 때문이며 그럼으로써 그 사람의 실력을 깎아 내리기 위함이다. 반면에 10000배가 된 사람에게는 반드시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심리다. 10배 정도는 어쩌다 될 수 있겠지만, 10000배라면 얘기가 달라져도 한참 달라져야 한다는 심리가 작용하게 된 결과다. 과연 그럴까?

월스트리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인 투자가로 손꼽히는 제시 리버모어의 삶과 투자에 대해 쓴 ‘어느 주식투자자의 회상’에서 작가인 에드윈 르페브르는 이렇게 썼다. ‘내가 큰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사고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 아니라 진득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저자인 르페브르의 말이 아니라 리버모어의 말이다.

결론은 10000배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도 신적인 능력이 있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건 해마다 겨울이면 듣게 되는 수능 만점자가 하는 말과도 같다. ‘학교 수업 충실히 듣고, 교과서 위주로, 충분히 수면도 취해 가면서 공부했다’는 말과 같다. 사실 이런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절대 믿지 않는다. 특별한 뭔가를 숨기기 위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큰 돈을 벌지 못한다. 위대한 투자가가 ‘지혜’가 아니라 ‘진득함’에 있다고 아무리 그의 인생 비밀을 털어놔도 우리는 지혜만 배우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손실이 발생하는 하락장에서는 뭔가가 있을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에 빨리 손을 떼고 빠져 나오지를 못한다. 금방 회복될 것이라는 엉뚱한 기대와 희망을 갖기 때문이다. 반대로 강력한 상승장에 들어서면 오히려 초기에 조금 오른 주식이 언제 떨어질 지 몰라서, 겁을 내다가 조급한 마음에 주식을 팔아 치우고 만다. 그래서 주식 좀 한다는 사람치고 재미 좀 봤다는 말 듣기가 그렇게 힘든 법이다.

결론은 우리는 정말로 무서워해야 할 때 희망을 갖고, 정작 희망을 가져야 할 때에는 공포를 느낀다. 사람들은 모든 현상을 대함에 있어서 믿어서 기쁘고 유리한 것은 쉽게 믿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자신에게 불리한 측면이 있거나 하면 애써 부정하려 하는 면도 있다. 10000배의 부자를 그렇게 경외하는 것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는 늘 고만고만한 사람들로 채워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친구 중에는 거부가 없다. 옆에 있는 장삼이사는 나 이상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깎아 내리고 평가절하 하게 된다.

사실 필요한 사람은 내가 들어야 할 말을 해 주는 사람인데, 거슬리기 때문에 옆에 두고 싶어 하지 않는다. 돈을 잃고 있을 땐 뭔가가 벌어져서 회복될 수 있겠지 하는 멍청한 희망을 가지고, 돈을 따고 있을 때는 조금 딴 돈을 잃으면 어떻게 하지 하는 욕심에 눈이 멀어서 그렇다. 그게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