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대법원이 29일 박근혜 전 대통령, 최순실 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사건에 대한 원심을 파기하고 고등법원으로 보내며 삼성전자가 흔들리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최순실 씨에게 건낸 뇌물액과 횡령액이 2심때보다 더 늘어난 가운데 일각에서는 법정 구속 가능성까지 열렸다는 말이 나온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기업에 대한 냉정하고 엄정한 잣대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경제위기 상황을 고려하면 다소 유연한 접근도 필요하다는 말이 나온다.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퀄컴의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17년 1월 미국 연방거래소(FTC)는 퀄컴이 모뎀칩 시장의 지배자적 위치를 이용하며 제조사들에게 과도한 로열티를 받는다며 전격 제소했다. 특히 문제가 됐던 부분은 독점 공급이다. 과도한 특허료도 문제지만 독점 공급이라는 족쇄를 통해 제조사들을 과도하게 옥죄고 있다는 것이 FTC의 주장이다. 이 싸움에는 애플과 같은 대형 제조사들도 참전해 전 세계로 확전됐다.

미 법원의 판단은 FTC의 승리로 이어졌다. 미 캘리포니아주 산호세 연방지방법원이 4월 FTC의 주장을 받아들이며 퀄컴의 특허료 사업 관행을 두고 반독점법 위반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법원은 “퀄컴의 관행은 많은 경쟁사들을 고사시켰다”면서 “결국 소비자에게도 피해를 준 셈”이라고 말했다. 이어 퀄컴이 특정 업체와의 독점 공급 계약도 맺지 못하도록 했으며 향후 7년간 모니터링 결과를 법원에 제출하도록 하는 한편 법원의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별도의 자료도 요구했다. 퀄컴의 손발을 다 묶는 조치다.

▲ 미 법무부가 법원에 퀄컴에 대한 전향적 판단을 요청했다. 사진=최진홍 기자

그런데 지난 26일(현지시간) 반전이 벌어졌다. 항소 과정에서 제9연방순회항소법원이 FTC가 퀄컴에 명령한 시정명령을 유예하라고 판결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 판결은 퀄컴의 승리가 아니라 FTC의 강력한 시정명령을 늦추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 의미는 상당하다. 지난 4월 판결로 퀄컴은 즉각 자사의 라이선스 관행을 변경하는 시정명령을 수행해야 했으나, 이번 판결로 당장의 비즈니스 모델 변화는 피하며 한 숨 돌리게 됐기 때문이다. 

퀄컴의 라이선스 비즈니스를 총괄하는 도널드 로젠버그 퀄컴 수석부사장은 "우리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기쁘다"면서 "우리는 우리의 관행을 유지할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퀄컴은 5G의 중요한 시기에 모바일 통신의 핵심 기술을 개발하는데 계속 투자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극적인 반전의 도우미 중 하나는 미 법무부가 꼽힌다. 미 법무부는 지난 4월 미 캘리포니아주 산호세 연방지방법원이 FTC의 손을 들어주자 이례적으로 퀄컴에 대한 반독점 판결집행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미 법무부는 퀄컴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며 미국의 5G 경쟁력을 위해 신중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를 제9연방순회항소법원이 받아들인 셈이다.

현재 미국은 중국과 치열한 경제전쟁을 벌이는 한편 5G를 중심으로 하는 기술전쟁도 치열하다. 화웨이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의 기술굴기를 꺾어 미국 중심의 ICT 패권을 유지하는 것이 지상목표다. 이런 상황에서 5G의 퀄컴이 반독점 심사에 발목이 잡혀 비즈니스 모델이 약화되면, 이는 곧 국가 경쟁력의 약화로 봤다. 미 법무부가 퀄컴의 손발을 묶지 말아달라고 요청한 이유다.

중국도 사정은 비슷하다. 경제를 위한 길이라면 과감한 정치적 선택을 통해 규제를 풀어주고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중국 정부는 최근 자국 반도체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무려 34조원 규모의 새 정부펀드를 출범시켰으며, 이 외에도 다양한 정책적 지원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미중 무역전쟁은 물론 한일 경제전쟁의 치열한 전쟁터에 내몰린 상태에서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계제로 상태에 놓여져 있다. 당장 국가 경제는 흔들리고 있고 기업들은 ‘공포’에 가까운 비명을 내지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도 미 법무부가 퀄컴 사례에서 보여준 유연한 대응이 나와줘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대법원 판결이 나온 후 삼성과 경제단체의 반응에도 비슷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삼성전자는 대법원 판결 직후 입장문을 통해 “저희 삼성은 최근 수년간, 대내외 환경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어 왔으며, 미래산업을 선도하기 위한 준비에도 집중할 수 없었던 게 사실입니다”면서 “갈수록 불확실성이 커지는 경제 상황 속에서 삼성이 위기를 극복하고 국가경제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과 성원 부탁 드립니다”고 말했다. 결국, 기업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달라는 읍소다.

전국경제인연합회와 한국경영자총협회도 비슷한 반응이다. 이들은 “글로벌 무한경쟁 시대에 이번 판결로 인한 삼성의 경영활동 위축은 개별기업을 넘어 한국경제에 크나큰 악영향을 더하지 않을까 우려된다”면서 “경영계는 이번 판결이 삼성그룹 경영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정부 차원의 정책적·행정적 배려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죄를 지었으면 처벌을 받아야 하며, 이는 국민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할 가치판단척도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살아있는 권력의 압박에 수동적인 입장일 수 밖에 없는 한국 기업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야 하며, 유연한 접근이 필요한 순간에는 과감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