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황대영 기자] 일본이 28일 한국에 대한 2차 경제 보복 조치로 대(對)한국 수출 통관 절차에서 간소화 혜택을 주는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했다. 정부는 3년간 예산 5조원을 투자하는 등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재계·산업계에서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날 자정을 기해 한국을 수출심사 우대국인 '그룹A'(백색국가)에서 제외하는 개정 수출무역관리령을 시행했다. 앞서 일본은 지난 4일 한국의 반도체 산업에 사용되는 3가지 소재 수출 절차를 까다롭게 하는 1차 경제 보복 조치를 단행한 바 있다.

그룹A는 기존 백색국가로 일본기업들이 전략물자를 수출할 때 3년 단위로 1번 심사를 받으면 허가를 다시 받지 않아도 되는 '일반포괄허가'가 가능한 국가다. 그룹A는 미국과 영국 등이 해당한다.

한국은 일본의 이번 조치로 브라질, 터키 등이 포함된 그룹B로 강등됐다. 그룹B는 일본기업들이 전략물자를 수출할 때 계약마다 개별 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 까다로운 수출 절차를 거치게 된다.

특히 그룹B 국가는 비전략물자라고 하더라도 일본 정부가 군사 전용 우려가 있다고 판단할 경우, 캐치올(상황허가·모든품목규제) 제도가 적용돼 한국 기업의 수입절차에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 사실상 식품, 목재를 제외한 모든 품목이 일본 정부의 입맛에 따라 수출규제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와 재계·산업계가 대응 방안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정부는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한 정면돌파로 극일을 다짐했지만, 재계·산업계에서는 국가 간 해결이 되지 않으면 피해가 지속될 것이라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당·정·청, 日 대응 향후 3년간 5조원 이상 투입…극일 다짐

더불어민주당과 정부, 청와대는 28일 일본의 한국 백색국가 제외 발효에 따라 소재·부품·장비 공급망 조기 안정과 상용화를 위해 내년부터 2022년까지 3년간 정부 예산 5조원 이상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당·정·청은 이날 '일본 수출규제 대응 당정청 상황 점검 및 대책 회의'를 열었다. 당에서는 정세균 대책위원장과 최재성 일본경제침략특별위 위원장, 윤관석 정책위 수석부의장, 김성수 국회 과방위 간사 등이, 정부에서는 유영민 과기부 장관, 노형욱 국무조정실장 등이, 청와대에서는 김상조 정책실장이 각각 참석했다.

당·정·청은 우선 제품·원료의 일본 의존도와 국내 기술 수준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R&D(연구개발) 대응이 필요한 우선 품목 100개 이상을 4개 유형으로 선발해 진단하는 작업을 진행해 오는 12월까지 완료할 계획이다. 정부 주도 하에 선별된 산업을 우선적으로 육성하겠다는 방침이다.

또 대외의존도가 높은 핵심 품목 관련 R&D 사업은 경제성 중심 분석 대신 효과성 중심 분석을 적용하는 한편, R&D 활성화를 위해 예비타당성조사(예타) 면제가 확정된 1조9200억원 규모의 3개 연구개발 사업을 조속히 추진한다.

정책 지정 R&D 사업에 참여하는 수요 대기업에 대해서는 연구비 매칭 기준을 기존 50%에서 중소기업 수준인 40%로 끌어내렸다. 이를 통해 핵심 품목 관련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형 R&D 활성화를 도모하기로 했다. 이는 정부가 주도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R&D 참여를 이끌고 수요처가 확실한 부분부터 집중적으로 육성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당·정·청은 이날부터 시행되는 일본의 백색국가 한국 제외 조치와 관련해 소재부품 수급 대응 지원센터를 중심으로 부품 수급 현황을 점검하고 대체 수입처 확보를 지원하는 등 기업 애로사항 해소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모두 발언에서 "우리 정부는 일본의 이율배반적 태도에 대해 여러 가지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라며 "일본 아베 총리는 프랑스 G7 회의 등 국제외교행사에서 '역사는 다시 쓸 수 없다'라고 한다. 자신에게 써야 할 말을 한국 정부를 비난하는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다"라고 작심 비판했다.

이어 김 실장은 "이번 상황이 언제 어떻게 종식되더라도 그와 무관하게 우리의 소재·부품·장비 산업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혁신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재계·산업계, 외교적인 문제로 불거진 사태에 난감한 입장

일본의 한국 백색국가 제외 시행에 따라 재계와 산업계에서도 대응을 마련하고 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 하에 단계별 방안까지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양국의 정부 간에 벌어진 외교적인 문제로 이 부분부터 해결되지 않으면 출구전략 또한 막막한 상황이다.

일본은 1차 경제 보복 조치로 한국의 반도체 산업에 초점을 맞췄다. 이어 일본은 2차 경제 보복 조치 이후 타 업종으로 추가 규제 카드를 꺼낼 수 있는 상황을 마련했다. 지난 27일 세코 히로시게 일본 경제산업상은 각의 후 기자회견에서 "(개정 수출무역관리령 시행을) 엄숙히 운용해 나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전자 업계에서는 일본 정부가 추가로 캐치올 제도를 실시할 가능성까지 열어두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업종은 주요 공정이 필요한 핵심 소재들의 일본 의존도가 높다. 이 때문에 일본 정부가 글로벌 공급망을 훼손하지 않고 한국 산업에만 초점을 맞춘 규제 카드를 꺼내들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반도체 업종은 일본이 추가로 수출 규제 품목에 넣을 가능성이 높은 품목으로 실리콘 웨이퍼와 블랭크 마스크 등이 거론되고 있다. 무역협회와 하나금융투자 보고서에 따르면 실리콘 웨이퍼는 일본 의존도가 52%, 블랭크 마스크는 65.5%로 추정된다.

또 습식 각기, 에폭시 수지, 조립용 접착기, OLED 패턴 형성, 이송 장비 등 일본 의존도가 높은 품목에 수출 규제가 가해지면 생산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이 크다. 반도체·디스플레이 업종은 대체 소재 개발 및 대체 공급처, 설비 다변화를 확보하더라도 실제 생산 적용까지는 시기가 필요한 점도 난감한 상황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대일 의존도가 높은 소재·장비 분야에서 일본 정부가 추가적인 캐치올 제도 적용 시 품목은 대폭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또 산업계의 대응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의 다음 규제 타깃이 어디로 향할지 모르기 때문에 대응책 마련에도 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재계 관계자는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로 영향을 받는 산업에서 다방면으로 대안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일부 업종에서는 이미 대안을 마련한 것으로 알고 있다"라며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살펴보면 한·일 정부 간에 외교적 마찰로 발생했다. 이를 산업에서 대응하기는 쉽지 않고, 근본적인 문제 역시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