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닮은 너, 종이 위에 여러 물감 90×72㎝, 2010.

어슬렁거리며 소달구지를 끌고 들길 걷던 소년이 양지바른 비탈 가상스러운 애기복수초를 호두알 같은 손으로 감싸 찬바람 막아주었다. 그날 소년이 본 것은 꽃이 아니라, 신성(神性)이었다!

홀씨가 짝을 만나는 기적(奇跡)을 어떻게 이뤄내는가. 단지 바람에 날리는 씨앗으로 여겼다면 애당초 희생이란 없고 겨울에 피어날 수 있었을까. 가녀린 몸짓으로 꽃씨를 찾아 나선 건 완전한 사랑을 원해서다. 숨결을 나누고 꽃을 피우기 위해 바람을, 겨울 눈보라를 뛰어넘은 것. 진실을 만나러 가는 길목에서 노랑 민들레 한 송이가 말을 건넸다. '끌림은 어쩔 수 없어. 둘은 느끼니까!'

오솔길서 싹튼 소년의 어슴푸레한 戀情
볼록볼록한 산봉우리들은 휘어진 개울과 사이좋게 이어져 나란히 세상과 만나고 있었다. 아무도 일러주지 않아도 스스로 넘침 없이 절제하는 야생(野生)의 질서들. 강가 숲엔 이야기의 목록들이 늘 풍성했다.

 

 

그의 향기, 종이 위에 여러 물감 80×75㎝, 2009.

새들은 부지런 했고 나들이를 다녀올 때 마다 새록새록 바깥소식을 물고 왔다. 지난밤 백매화가 핀 집에 탄생한 아기며 어느 작은 연못 붕어 떼들의 겨울축제가 있었다. 그런가하면 찔레덩굴 우거진 구릉 어지럽게 나뭇가지에 걸린 깃털을 모으며 친구를 보내는 꼬리 긴 꿩들의 장례행렬 슬픔도 함께 전했다.

맑디맑은 날, 엄마 손을 잡고 들길을 가로질러 외가(外家)를 가던 아이가 돌부리에 발이 채이자 잉잉 투정을 부렸다. ‘몸이 몹시 아픈 애기 산이 흘린 눈물이 돌이 된 거래.’ 엄마는 나직하게 아이를 달랬다. 이 한마디에 울음을 그친 아이가 난생 처음 햇무리구름을 보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이젠 머쓱했을까. 눈물자국 위 배시시 해맑은 웃음이 공중으로 높이 번져나갔다.

인적 드문 조그마한 산촌(山村). 강아지 한 마리가 바람에 날려 맴도는 나뭇잎에 홀려 따라가다 하마터면 개울에 곤두박질 칠 뻔했다. 분함을 견디지 못하고 벌겋게 달은 콧구멍에 허연 김을 내뿜다 저녁 어스름 귀가하는 풋풋하게 자란 소년에게 숨 가쁘게 달려갔다.

 

 

 

 

꿈꾸는 시간, 종이 위에 여러 물감 50×45㎝, 2010.

눈 덮인 뒷동산 숲 망개나무 열매는 온화한 노을빛에 올망졸망 맵시를 뽐내듯 달려 너무나 귀여웠다. 무료한 듯 오솔길을 느릿느릿 오르던 소년에게 청아한 새소리가 한줄기 아름다운 영상으로 흘렀다.

오렌지색 빛깔을 띠며 다정히 날아가는 호반새 한 쌍의 경이로운 풍경에 한참을 서 있었던 그날 이후, 소년의 마음엔 미묘한 외로움이 아른거렸다. 그날도 어둑어둑한 산길을 돌아오는 길에 소년은 시원하게 오줌을 쌌다. 잔설(殘雪)이 녹으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때 불현 듯 그의 마음에도 애틋한 연정(戀情)이 조금 조금씩 싹텄다.

권동철 문화전문 기자 kd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