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미중 경제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가운데, 최근 미국은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는 강펀치를 날렸다. 이로 인해 다양한 시나리오가 검토되는 가운데 미국의 저력에 새삼 집중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무슨 권리로, 무슨 힘으로 G2 수준으로 부상한 중국을 '조작국'으로 규정할 수 있었을까? 바로 기축통화, 달러의 힘이다. 1985년 프라자 합의를 통해 미국이 장기불황에서 벗어나고 일본과 독일이 오랜 불황에서 허덕였던 기저에도 달러의 힘이 큰 위력을 발휘한 바 있다.

금본위제 이후의 금환본위제도(金換本位制度) 시대가 끝나고 달러를 중심으로 하는 기축통화가 부상하며, 글로벌 경제는 표면적으로 한계를 모르는 '무한의 여백'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제 힘을 가진 국가는 기계적으로 돈을 찍어내거나 빨아들이며 글로벌 경제를 임의로 조율할 수 있게 됐으며,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심각한 폐혜는 더욱 진한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새롭고 강력한 질서가 등장했으나 발 밑의 공포는 더욱 깊어지는 위험의 시대. 여기에 디지털 자산으로 통칭되는 암호화폐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 비트코인의 행보에 시선이 집중된다. 출처=갈무리

비트코인, 중앙은행을 비토하다
"코인 소유자는 거래 내역에 디지털 서명을 한 후 다음 사람에게 전달하고, 받은 사람은 자신의 공개 키를 코인 뒤에 붙입니다. 돈을 받은 사람은 앞 사람이 유효한 소유자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08년 10월 정체불명의 인물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사람은 'Bitcoin: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이라는 9쪽의 논문을 웹에 공개했다. 비트코인의 등장이다. 비트코인은 2009년 1월 최초로 발행되며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사토시는 논문을 발표하며 정부나 중앙은행의 개입이 없이 순수하게 개인과 개인의 빠르고 안전한 거래를 지향했다. 최대 발행양은 정해져 있었으며 모든 참여자가 장부를 공유하며 신뢰도를 상호보완한다. 그는 왜 개인과 개인의 거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탈 중앙화의 디지털 자산을 고안했을까? 

그는 논문을 통해 "중앙은행은 통화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신뢰할 수 있어야하지만, 화폐 통화의 역사는 그 신뢰의 위반으로 가득합니다"고 적었다. 사토시가 논문을 발표하던 시기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혼란의 순간, 사람들의 지갑이 얇아지며 우버와 같은 공유경제의 탈을 쓴 합리적 소비의 방식인 온디맨드 플랫폼이 태생되던 때였다. 그는 정부와 중앙은행, 금융당국이 주도하는 기존 금융질서는 억압과 속임수의 연속이며 탈 중앙화를 통한 새로운 화폐질서가 디지털 자산의 이름으로 시대의 주류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시간이 흘러 채굴 방식의 비트코인이 아닌, 스마트 컨트랙트를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암호화폐가 우후죽순 등장했으며 이들은 거래 속도의 개선과 투명성 고도화 등 다양한 목표를 설정하고 하드포크를 비롯한 많은 수단을 강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디지털 자산 특유의 불투명하고 신뢰받지 못하는 정체성은 여전하고 많은 사건 사고를 일으키고 있으나, 최소한 이들 암호화폐가 원하는 근본 정체성은 달라진 적이 없다. 바로 새로운 화폐질서다.

암호화폐는 어떻게 새로운 화폐질서를 구축하려는 것일까. 방식은 간단하다. 특정 영역에 존재하는 기존 생태계를 작동시키는 원동력을 기존 화폐가 아닌 암호화폐로 대체하는 전략이다. 

예를 들어 자전거를 공유하는 플랫폼이 운영되고 있다면, 기존에는 돈을 내고 자전거를 사용했지만 이제는 암호화폐를 내고 자전거를 사용한다.

암호화폐 전문가들은 여기에 토큰 이코노미의 전략을 넣으며 기존 생태계 구동 방식과는 전혀 다른 가능성도 타진한다. 자전거를 공유할 때 돈이나 암호화폐를 내는 것이 아니라, 해당 자전거 공유 플랫폼을 외부에 홍보하거나 혹은 자전거를 이용하며 발생하는 데이터를 플랫폼에 제공해 서비스 고도화에 기여를 할 경우 암호화폐를 무료로 받는다. 이를 돈처럼 지불하며 다시 플랫폼을 이용하는 선순환 구조다. 

자연스럽게 암호화폐와 토큰 이코노미로 구축된 생태계는 '마이크로 리코드'와 같은 새로운 가능성도 보여줄 수 있다. 디지털. 매우 정밀하게 측정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의 디지털 기반이기 때문이다.

암호화폐와 토큰 이코노미는 곧 재화의 이동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이제 우리는 달러나 원화로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암호화폐를 받으려 서비스를 이용하고, 이를 서비스에서 다시 활용해 궁극적으로 서비스의 중요한 일원이 된다. 서비스의 고객이 아니라 고객이면서 주인이 되는 셈이다. 이는 기존 기축통화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이다.

암호화폐가 새로운 시대의 기축통화를 꿈꿀 수 있는 호기로운 꿈을 꿀 수 있는 배경이다. 만약 작은 자전거 공유 플랫폼이 아니라 거대한 이용자를 이미 보유한 SNS 플랫폼이 자체 암호화폐를 발행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세계 최대의 암호화폐 거래소가 자체 암호화폐를 발행해 이를 전 세계에 통용될 수 있도록 유도하면 어떻게 될까. 이들은 토큰 이코노미를 가동하며 이 과정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확보하고, 디지털 특유의 신속성으로 지금까지 우리가 상상은 했으나 기술적으로 구현하기 어려웠던 많은 디앱을 생성할 수 있다.

페이스북, 바이낸스...새로운 주인이 되려는 자
페이스북은 최근 프로젝트 리브라를 통해 자체 암호화폐 발행을 시도하고 있다. 세계 최대 SNS 플랫폼을 가진 상태에서 내부에 기존 기축통화가 아닌 자사의 암호화폐를 발행해 강력한 생태계를 구축하는 전략이다. 글로벌 암호화폐 거래소 바이낸스도 비너스 발행을 통해 비슷한 목표를 세웠다.

페이스북의 리브라와 바이낸스의 비너스는 모두 스테이블코인이다. 즉, 일정부분 현실경제에 영향을 받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암호화폐라는 뜻이다. 이를 바탕으로 자기들의 거대한 생태계에서 자체 암호화폐를 발행, 사실상 '탈'달러를 꿈꾸고 있다.

기존 화폐질서를 장악한 이들이 페이스북과 바이낸스의 시도를 좌시할리 없다. 당장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리브라의 존재가 알려지자 7월 12일 트위터를 통해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의 가능성에 부정적인 트윗을 남겼다. 그는 “변동성이 큰 비트코인은 화폐가 아니다”면서 “규제없는 암호화폐는 불법적인 활동을 촉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페이스북의 리브라 프로젝트도 견제하며 "신뢰성이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파월 미국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도 페이스북의 리브라 프로젝트가 자금세탁의 원흉이 될 수 있다며 “상용화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금세탁은 물론 개인정보보호 및 소비자 보호 등에 있어 문제가 있다”면서 “페이스북이 부작용을 차단할 수 없다면 규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페이스북 리브라는 미 하원의 반대에도 직면했고, 연내 출시가 불투명해졌다. 많은 국가에서 암호화폐 발행에 엄격한 제한을 거는 장면의 연장선이다.

거대한 생태계를 가진 이들이 암호화폐를 통해 자체 기축통화를 구축, 디앱과 토큰 이코노미를 가동하는 전략을 두고 '다른 각도에서 봐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사토시가 꿈꾸던 세상은 중앙 플랫폼이 존재하지 않는, 개인과 개인이 중심이 되어 재화를 거래할 수 있는 시대다. 그런데 페이스북과 바이낸스를 비롯해 국내의 카카오, 업비트 등은 모두 강력한 중앙 플랫폼을 상징하는 곳이다. 이상하다. 정부와 중앙은행, 금융당국의 속임수에서 벗어나 개인과 개인이 자유롭게 거래하는 이상적인 화폐질서를 꿈꾸던 암호화폐의 정신이 여전히 중앙 플랫폼에 갇혀있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우리는 플랫폼만 제공할 뿐"이라던가 "탈 중앙화보다 마이크로 레코딩, 토큰 이코노미가 더 가치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인과 개인의 거래를 디지털 기술로 연결한다는 암호화폐의 정신이 새로운 기축통화로 부상하며 여전히 '권력'을 쥐는 장면은 부자연스럽다. 이는 기존 화폐질서를 지키는 이들에게 좋은 공격 명분이 된다.

특히 페이스북의 경우 잦은 플랫폼 오류, 투명하지 않은 콘텐츠 노출, 개인정보 취약점을 두고 비판을 받는 상황에서 "어떻게 페이스북에 민감한 금융정보를 맡기나"라는 회의감도 감지된다.

최근 중국 정부는 자체 암호화폐 발행을 시도하고 있다. 이 역시 새로운 시도라기 보다는 새로운 기축통화 후보군으로 부상한 암호화폐 시장을 선점해 자기들의 중앙 플랫폼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탈'달러의 기조는 따르지만, '탈'기존화폐질서에는 관심이 없다는 평가다. 화웨이 창업주 런정페이 회장이 7월 26일 “중국이 블록체인 기반의 리브라와 동등한 가치제안(value proposition) 암호화폐를 빠르게 만들 수 있다”면서 리브라에 호의적인 입장을 보이자 미 하원에서 즉각 반응이 나온 지점도 의미심장하다. 

실제로 미 상원 은행위원회는 “미국이 블록체인·암호화폐 산업에서 중국보다 선두에 서야 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제도권 금융의 패권 경쟁 측면에서 리브라를 용납할 수 없지만, 미중 무역전쟁의 주역인 중국이 리브라와 같은 암호화폐 및 블록체인 전선에 뛰어들 경우 이를 좌시할 수 없다는 논리가 깔렸다. 이들에게 암호화폐는 디지털 자산의 새로운 가능성이 아니라, 적에게 넘어가지 말아야 할 패권경쟁의 도구일 뿐이다.

▲ 트럼프 대통령이 암호화폐를 비판하고 있다. 출처=갈무리

첩첩산중
암호화폐가 새로운 시대의 기축통화가 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디앱의 쓰임새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암호화폐 자체의 엄청난 변동성을 제어해야 한다. 취약한 시스템 인프라를 보강하는 한편 모럴해저드도 관건이다.

업계에서는 암호화폐의 근간인 블록체인 기술에 대한 집중이 필요하고, 이를 바탕으로 생태계가 넓어져 기존 산업군과의 접점이 많아져야 한다고 본다. 물류와 항만 등 블록체인으로 사업 효율화를 끌어낼 수 있는 영역을 개척하는 한편 카카오의 클립, 테라의 차이 등 다양한 시도도 나와줘야 한다.

동전없는 시대, 지폐없는 시대의 최대수혜자는 디지털 자산이며 이는 암호화폐에도 기회의 땅이다. 결국 기축통화가 되려면 해결해야 할 다양한 리스크를 제어할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주고 오프라인 접점을 늘려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는 방법 외에는 길이 없다. 지금 이러한 시도가 전격적으로 벌어지고는 있으나, 아직은 명확한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무게가 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