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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014년]한국화가 송수련①‥관조와 감성세계
   
▲ 내적시선-관조, 100×244㎝

서양의 유화란 날줄과 씨줄의 교차로 직조된 천위에 물감이 구축적으로 올려진 그림이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이른바 '빽칠’을 해서 그 구멍들, 씨줄과 날줄의 틈들을 단호하게 봉쇄한다.균질하게 칠해진 바탕에 비로써 물감 들이 들러붙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바탕은 지지대로서, 물감들이 딛고 올라갈 수 있는 바탕으로 존재한다. 그 ‘빽칠’에 의해 안과 밖이 분리되고 위와 아래가 나뉘고 서로가 차단된다. 화면은 그 배타성으로 단호한 토대를 이루고 압력과 붓질을 완강하게 맞아 선다.

   
▲ 130×120㎝

탱탱한 캔버스천은 작가의 신체가 실존적으로 기능하는 명료한 공간으로 구체화된다. 캔버스를 이젤에 걸어두고 그림을 그리던 르네상스시대의 화가로부터 캔버스 천위로 걸어 다니던 잭슨 폴록에 이르기까지 서구미술사의 궤적은 다름 아닌 그 캔버스라는 공간화면에 대한 인식의 여정일 수 있다.

이 자족적 공간, 세계로서의 화면에 대한 인식과 사유는 결국 외부세계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모방해내는 거창으로서의 공간으로부터 별개의 독립된 자족적 공간으로서의 캔버스라는 존재인식으로 변모해왔던 것이다.

화가란 존재는 그 공간을 여하히 점령해가는 점유해나가는 존재들이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를 세우는 자에게로 열린, 무한히 비어 있는 처녀지이다.

   
▲ 206×292㎝

반면에 동양화에 있어 한지란 놀라운 개방성, 투명성을 지닌다. 그것이 종이의 속성이다. 물(水)의 중개, 매개에 의해 종이, 바탕은 그 위에 얹혀지는 모든 것들을 속 깊은 곳까지 받아들인다. 그것들과 하나가 되어 새롭게 태어난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먹의 스침이나 안료의 스며듦은 바탕 위에 구축되는 선이 아니라 속내가 되어 환생한다.

그런 면에서 그림의 바탕이 되는 한 단면은 자신의 존재를 강변하거나 드러내거나 혹은 소멸되어 버리지 않으면서 다시 살아난다. 그런 한지의 속성은 결국 무한한 포용과 변이의 가능성 아래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숭숭 공기와 숨이 통하는 무수한 구멍의 연쇄가 그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또한 무한한 깊이를 보여준다. 노자가 그랬던가, “마음은 깊은 곳을 좋아한다(居善淵)”고, 그 담백의 깊음은 다름 아니라 물의 깊음이다.

   
▲ 139×199㎝

동양인들은 물이 만물을 이롭게 할뿐 다투지 않는다고들 믿었다. 그래서 모든 동양의 그림은 그 물이 등장한다. 물은 한지의 깊은 곳까지 먹이나 물감과 함께 삼투해 들어가 모종의 깊음을 보여준다. 무릇 동양의 그림은 어떤 깊음을 지향한다.

한지는 그 깊음을 기꺼이 받아준다. 또한 그 깊음을 투과한다. (한국화가 송수련,한지화가 송수련,종이회화 송수련,송수련 화백,宋秀璉,SONG SOO RYUN,송수련 작가,Hanji Painter SONG SOO RYUN,한지작가 송수련,여류중견화가 송수련,종이회화 송수련,KOREA PAPER ARTIST SONG SOO RYUN, KOREAN PAPER ARTIST SONG SOO RYUN)

△박영택/미술평론가

권동철 미술칼럼니스트  |  kdc@econovill.com  |  승인 2019.08.20  19: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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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믹리뷰, #권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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