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나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날을 함께 해요.

전람회에서 활동하던 김동률과 패닉에서 활동하던 이적이 1997년도에 만든 프로젝트 앨범의 곡, ‘거위의 꿈’이라는 곡의 일부다. 이를 2007년도에 인순이가 리메이크해서 새롭게 인기를 끌었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맞이하여 암울했던 사회적 분위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꿈꾸며 좋아했던 곡이다. 한 때 좀 분위기 있는 노래라면 ‘거위의 꿈’ 정도는 불러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사람이 꽤나 있었을 정도다.

거위는 야생 기러기를 길들여 식육용으로 개량한 조류다. 거위가 언제부터 날지 못했는지는 모르지만 비상을 꿈꾸는 거위가 적절한 노래의 소재로 활용이 된 듯 하다. 아마도 그 옛날 오래 전 조류라는 동물이 처음 생겨났을 때는 날지 못하는 새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날지 못하는 새들이 생겨났다. 천적이 없는 섬이라는 독특한 생태 지역이나 대형화 되면서 날개보다는 다리가 발달된 오늘날의 대형 조류가 되거나, 사람들에게 붙잡혀 길들여지고 품종이 개량되면서 가금류가 된 것도 많다.

그런데 사람들이 일부러 길들인 것도 아닌데, 스스로 날기를 포기해 가는 새들이 있다. 도심지에 떼지어 몰려다니는 비둘기들이다. 조만간 새로운 종이 나타나지 않을까 싶다. 평화의 상징이라며 큰 행사 같은 데서도 사용이 되고, 뛰어난 귀소본능으로 인해 전서구(傳書鳩)라 하여 편지를 배달하기도 하면서 사람들 옆에 있었다. 일단은 비둘기가 잘 날았기 때문에 전서구로도 활용이 되었다. 하지만 21세기 도심지에 사는 비둘기는 사람들의 생활공간 주변을 맴돌기만 할 뿐, 별도의 먹이 활동을 하지 않게 되었기에, 덩치는 작은 닭 만하고 날지 않고 도심지를 걸어 다니기에 닭둘기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눈 앞에 보이는 먹이 때문에 스스로 날개를 접어

누가 닭둘기로 만들었을까? 예전에는 비둘기들이 모여 있다가도 사람들 발소리만 나도 다 날아가곤 했지만, 요즘은 누가 발소리를 내는 지 쳐다 볼 뿐이다. 멀리서 자동차가 오는 소리만 들려도 날아갔지만, 요즘은 차가 가까이 다가오면 겨우 몇 걸음 옆으로 걸어서 피한다. 그리고 예전에는 모이를 줘야 모여들곤 했는데, 요즘은 사람 근처를 어슬렁거리거나 모이를 달라고 모여서 떼를 쓰는 것 같다. 비둘기가 닭둘기가 된 것도 먹고 사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눈 앞에 보이는 먹이를 쫓아서 스스로 날개를 접어버린 닭둘기 같은 운명은 사실 주위에서 드물지 않다.

또 다른 얘기 하나가 생각난다. 옛날 동자승을 앞세운 스님이 시골길을 가다가 해가 저물어 어느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암소 한 마리로 4가족이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통에 스님과 동자승은 끼니도 거른 채 오두막집 구석자리를 겨우 빌릴 수 밖에 없었다. 농부는 미안해하면서도 두 아들과 아내까지 온 가족이 새벽부터 함께 밤늦게까지 소 먹일 풀을 베고 젖을 짜고 우유를 팔고 하지만 겨우 암소 한 마리가 생산해 내는 우유로는 입에 풀칠하기에도 벅찰 지경임을 털어놨다.

잠 자리에서도 스님은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동자승을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는 ‘다시는 찾을 수 없게, 암소를 산으로 끌고 가서 벼랑 아래로 보내 버리고 오라’고 시켰다. 동자승은 ‘그러면 농부의 가족들이 굶어 죽게 될 텐데’ 걱정이 들면서도 스님이 시키는 대로 농부가족 몰래 암소를 보내 버렸다. 날이 밝자 스님과 동자승은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그로부터 일년 여 뒤, 다시 그 길을 가게 됐다. 동자승은 행여나 농부 가족이 잘 못 되기라도 했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지만, 그 집 앞에 당도하니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잘 가꿔진 마당이며 집 안팎이 전보다는 훨씬 나아져 있었다. 이번에는 저녁 식사도 배불리 대접 받았는데, 농부의 얘기가 이어졌다. ‘지난해 스님이 가신 뒤로 집안의 유일한 재산이라 할 수 있는 암소를 잃어버려 앞이 캄캄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를 되 찾을 길이 없다는 것에 이내 체념하고서는 4 가족 모두가 남의 집 일을 해주고 품삯을 받고, 산에서 나무도 하고, 집 앞의 땅도 가꾸고 최선을 다해 살다 보니 수입이 늘어나 예전보다 오히려 잘 살게 되었다고 했다.

다음날 길을 걸으며 스님은 동자승에게 그제서야 속내를 털어놨다. ‘그 집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넷이나 되는데, 암소 젖이나 겨우 얻기 위해서 4명의 가족 모두가 하루 종일 매달려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고 했다. 암소가 소중한 재산이기는 하지만 가족들의 발목을 틀어쥐고 있는 족쇄나 마찬가지여서 차라리 암소가 없는 것이 그 가족들이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더라는 것이었다.

날기를 포기한 새를 새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주위에도 닭둘기 같은 존재들을 보게 된다. 그저 바쁘게는 움직이고 있지만 과연 일을 하고 있기나 한 것일까 의아스러운 상황도 보게 된다. 성과라고는 찾을 수도 없는 것임에도 자신이 해 오던 것들이라는 생각에 다른 것을 할 생각은 못한 채 매어 있는 안타까운 상황도 많다. 눈을 돌려보면 삶을 개선해 줄 수 있는 것들이 널려 있는데도, 가지고 있는 암소에만 정신이 팔려 있기도 한다.

내다팔 생각은 하지도 않으면서 개발에만 열심인 엔지니어들이 있다. 개발해서 잘 만드는 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 어떻게 하면 잘 팔릴 지에 대한 고민은 자기들의 몫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눈 뜨자마자 연구에만 매달리지만 일의 속도는 나지 않는다.

구색이 갖춰지지 않아서 팔지 못하겠다는 영업맨들도 있다.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서 고객이 찾아오기를 바란다. 어쩌다 한번 고객이 토막 정보를 듣고 먼저 찾아온 것을 계기로 고객을 찾아 다닐 생각을 접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자리가 편하면 앉아서 움직이기가 싫은 법이다. 만만하고 편한 고객은 누가 상대해도 잘 모신다. 중요한 것은 깐깐하고 불편한 고객을 잘 모셔야 매출이 늘고 회사가 잘 되는 법인데, 누구나 꺼린다. 기존에 해 오던 일에 익숙해져서 변하거나 새로운 것은 거부하게 된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닭이 되어가는 비둘기

경기도에 있는 모 지인의 회사가 있다. 꽤 괜찮은 제품들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얘기를 들어보면 회사가 조금도 성장을 못하고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만 받게 된다. 그 지인은 늘 자기는 엄청나게 열심히 하고 회사에 비전도 제시하는데 이것을 알고 함께 보조를 맞춰주는 직원이 없다고 몇 년째 하소연을 해댔다. 얘기 들어보면 직원들을 아끼는 마음도 가득하고 적절한 사업에 투자도 단행하고 직접 나서서 뛰어다니기도 하는데, 왜 그럴까 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그 의문이 풀렸다.

모 언론사 간부와의 저녁자리에 우연히 그 회사의 퇴직 임원이 함께 해 실상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사람을 키우지 않아서였다. 수도권이지만 지방이라 가뜩이나 사람 구하기가 쉽지 않은데,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는 데에 너무 깐깐했다. 그야말로 누가 보더라도 인정할만한 최고의 인재에만 목을 맸다. 사람을 구하는 데에 이렇게 더디다 보니 어떨 때는 들어오는 사람보다 나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어렵사리 사람을 구해 일을 맡기긴 했지만, 사람이 부족하다 보니 겨우 한 두 명이 감당 안 되는 많은 일을 다 처리해야 했다. 말이 일당 백이지, 서로 협업조차 되지 않는 곳에선 새 직원이 제대로 자리를 잡기도 버거웠다. 그러는 사이에도 학업, 출산, 이직으로 결원이 계속 생겼다.

두 사람이 빠져나간 자리를 혼자서 메우게 하면 어느 정도 버티다가는 중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사업 아이템은 늘어나는 데 사람 수는 줄어들고 있었다. 훨훨 날아 다니며 사냥을 해오라고 하지만 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일들로 발목은 늘 묶여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당장엔 억지로라도 일을 하고 있지만, 눈치만 보다가 때가 되면 날아가 버렸다. 버티고 버티다 일단 한번 날아 오르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남아서 묶여 버린 비둘기들은 오갈 데 없이 또 주저 앉아서 닭이 되어 갔다. 민첩하게 움직이기 보다는 먹을 수 있을 때까지 먹다가 위협이 느껴지면 비로소 슬쩍 피하고, 될 수 있으면 뭔가를 하지 않고 회피하게 되었다. 하는 척 할 뿐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서야 드러났다.

옛날 페르시아의 왕이 매를 좋아했다. 멋있게 비상하여 사냥을 하는 매의 모습에 매료되어 있었다. 어느 날, 매를 잘 조련하기로 유명한 조련사가 매 두 마리를 가져와 선물했다. 한 마리는 언제든지 비상하여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이며 왕을 흐뭇하게 만들었는데, 다른 한 마리는 날아 오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두 마리 모두 날아 오르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왕은 왕국의 이름난 조련사들을 불러모았지만 모두 실패했다.

날지 못하는 매인가 싶어 포기하며 지내던 그때였다. 사냥을 나갔다가 궁으로 돌아오던 왕이 매 두 마리가 멋지게 활강을 하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날지 않던 다른 한 마리 역시 멋지게 날아오르고 사냥을 하는 매였다. 왕은 어떤 조련사가 그 같은 일을 해냈는지 궁금하여 물었다. 뜻밖에도 왕궁 근처에 사는 이름없는 농부였다. 왕은 그 농부를 불러서 어떻게 해서 매가 날아오르게 할 수 있었는지를 물었다.

“저는 그저 매가 앉아서 움켜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잘랐을 뿐입니다.”

스스로가 닭둘기가 되기도 하고, 주위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닭둘기가 되기도 한다. 눈 앞의 먹이만 쫓아서 그렇게 된다. 새 직원은 비용일 뿐이라는 생각에 나중엔 조직이 기본적인 일도 처리 못해서 전전긍긍하게 된다. 지금 현재 돈을 벌어주는 눈 앞의 고객만 바라 보다가 고객이 망하면 덩달아 문을 닫는다. 사실은 기존 고객을 응대하는 것만으로도 적은 인원은 발바닥에 땀날 지경이다. 그렇게 매어 있거나, 주저 앉아 있다가는 흘려놓은 부스러기나 주워 먹는 닭둘기 신세를 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