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5년 2월 개최된 얄타 회담에 윈스턴 처칠,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오시프 스탈린(좌로부터)이 앉아 있는 모습. 출처=위키피디아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39세 때인 1921년 소아마비에 걸렸다. 보조기를 착용하지 않으면 설 수 없었다. 이후 상체를 강화하기 위해 수영 등 다양한 운동을 했다. 1932년말 대선에서 루스벨트를 32대 대통령으로 뽑은 미국민들은 그의 건강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50대에 접어든 그의 어깨와 팔뚝은 튼튼해 보였다.

1933년 3월 루스벨트의 취임사도 강력했다. “오직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The only thing we have to fear is fear itself).” 대공황에 시달리던 미국인들은 그의 말에 큰 용기를 얻었다.

용기있는 지도자 루스벨트는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승리를 이끌며 미국역사상 유일무이한 4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 재임 기간(1933~1945년) 내내 그의 몸 속에는 '마땅히 두려워했어야 할' 고혈압이 자라고 있었다.

‘진화의 배신’의 저자 리 골드먼 美 컬럼비아대학병원장에 따르면, 루스벨트가 1945년 4월 12일 갑자기 쓰러진 것은 소아마비가 아닌 뇌졸중 때문이었으며, 뇌졸중의 원인인 고혈압은 재임기간 내내 방치되어 있었다.

대통령 선거 1년 전인 1931년, 루스벨트의 혈압은 이미 경계선으로 간주되는 140/100(정상혈압 120/80mmHg 미만)였다. 1937년에는 162/98로 악화되었고,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하던 즈음에는 200/108로 심각한 수준이 됐다.

1944년 여름 공화당 전당대회를 앞두고는 두통이 잦았다. 그의 건강이상을 눈치챈 측근들은 런닝메이트(부통령)로 해리 트루먼을 지명하라고 강력히 조언했다. 측근들은 루스벨트가 4선에 성공하더라도 임기를 마치긴 힘들 것이란 생각에 차기 대통령까지 정해두려고 했다.

대선 후 루스벨트의 혈압이 더 높아졌다. 1945년 1월 네번째 취임식에서 루스벨트는 500단어 밖에 안되는 짧은 연설을 했다. 한달 뒤인 1945년 2월 처칠, 스탈린과 함께 얄타에서 전후 평화 협정을 맺을 당시 혈압은 260/150으로 치솟았다.

루스벨트의 고혈압은 거의 치료가 이뤄지지 않았다. 대통령 재임기간에 루스벨트의 건강을 살핀 백악관 주치의는 이비인후과 전문의 매킨타이어(해군 중장)였다. 그는 루스벨트가 숨을 헐떡거리는 등 건강이 나빠지는 것을 보면서도 독감과 기관지염이 원인이라는 진단만 내렸다.

뒤늦게 보다 못한 루스벨트 딸의 요청으로 심장 전문의가 진단한 결과 루스벨트는 고혈압으로 인한 심부전을 앓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제서야 주치의 매킨타이어는 염분을 줄인 저염식사를 권하고, 심부전 치료제를 처방했다.

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는 “뒷머리가 너무 아프다”라고 말한 뒤 의식을 잃었다. 쓰러진 직후에 잰 혈압수치는 무려 300/190이었다. 그는 몇 시간만에 숨을 거뒀다. 엄청난 고혈압이 뇌 속 동맥을 터뜨려 척수에까지 피가 새어 들어가는 ‘지주막하 출혈’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나이 63세, 자신이 정비해놓은 사회보장제도의 ‘노령연금’ 대상 연령에도 못미치는, 한창 일할 나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