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용산구에 있는 남영동에 대해 이야기 해 볼까 한다.

남영동은 남영동, 갈월동(葛月洞), 동자동, 용산동1가를 관할하고 있다.

먼저 남영동의 이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南營洞 남쪽을 경영하는 동네 또는 남쪽에 지어진 동네라는 뜻이다. 이름에 불화자가 두 개나 들어가 있다. 나무가 들어서면 불이 크게 일어나는 형상이라 번성할 수 있다.

조선 초에는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이었고, 1751년(영조 27)에 한성부 남부 둔지방(屯芝坊) 이태원계(梨泰院契)의 일부가 되었다. 1914년에는 경성부 한강통(漢江通)이라 불렸고, 1941년에 연병정(練兵町)으로 되었다. 1943년 용산구에 편입되었고, 1946년 남영동으로 바뀌었다.(두산백과)

갈월동이 재미있는데 이 지역에 칡이 많이 나서 갈월동이 되었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갈월도사(葛月道士)라는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유래된 이름이라고도 한다. 갈월동을 옛날에는 부룩배기라고 하였는데, 14번지 일대의 산줄기가 불룩하게 나온 데에서 유래한다.(두산백과)

과거엔 남영동이 숙대입구역으로 번성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점차 상권이 쇠하여 과거와는 못하다 .그러나 용산미군기지가 철수하면서 용산 땅값이 들썩이며 앞으로 개발됨이 분명하니 이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지역임은 틀림없다.

남영역은 남대문시장과 염천교 방면의 길이 만나 삼각지로 해서 한강대교를 건너가는 길을 중심으로 가지고 있고 그 길의 시작점으로 서울역이 있다.

남산의 줄기에서 뻗어 나왔으나 산의 기운에서 평지를 만난 자리라 땅의 모양은 좋은 모양이라 할 수 있다.

남산의 기운을 받은 자리이나 아래로 가면 한강의 기운을 받은 자리이기도 하니 필시 길지(吉地)임은 틀림없다.

다만 이곳은 모여 살았던 사람들이 다양하며 장사하던 사람들 노동자들 등 정말 노동자계층이 집단을 이루며 살던 터라 할 수 있다.

특히 1호선 남영역은 서울역과 인접하여 산업화 시대의 도시철도를 기반으로 많은 사람을 실어 나르던 의미 있는 터였다.

남영동을 상징하는 것은 미군부대였다. 이제 이전하여 이 터는 용지가 공원으로 바뀌게 된다.

억척스럽게 삶을 살아가고 서울 도심 중심에 미군부대가 있던 자리에 공원이 들어서는 것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공원은 사람이 쉬며 휴식을 취하는 역할을 하고 녹지가 많아 지면 도시에 산소를 공급하고 쾌적함을 안겨주는 기능을 수행한다.

남영동은 이제 쾌적한 곳으로 탈바꿈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바뀌게 될 터여서 인지 용산의 땅값은 이루말할 수 없이 올랐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보이는 지역이다.

남영동은 안정된 길을 가지고 있다. 넓고 평탄하며 시원하게 뻗어있다.

다만 사람들이 이동을 위해 많이 다니는 길로써의 역할이 더 많지 상권으로써의 가치는 신촌이나 명동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그도 그럴 것은 사람을 모을 수 있는 그릇이 될만한 지역이 없기 때문인데 남영동은 이 대로 뒤로 청파로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길이 두 개로 나눠져 그 모습이 흡사 개천의 물길이 두 개로 나눠 흐르는 모습과 같다.

청파로 위에는 숙명여자대학이 있어 사람이 모이는 그릇이 되지만 이곳 역시 산을 깎아 만든 길이므로 험지에 속한다. 험지는 사람이 모이는데 불편함이 있다.

다시 돌아와 이야기하면 힘이 약한 물길이 두 개로 나눠 흐르니 그 기운이 미약하며 어딘가에서 모이지 못하는 형국이다.

그러니 이 지역의 상권의 힘이 약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길이 완만하며 교통이 용이하고 향후 용산공원이 생긴다는 가정으로 생각해 보면 이곳은 길지(吉地)로 변할 자리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