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임관호 기자] 트럼프를 닮고 싶었던 아베. 그럴 만도 하다. 아베에게는 트럼프가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는 매력남으로 비쳤을 거다. 트럼프가 늘 부르짖는 자국 이기주의는 아베의 정치적 성향과도 일치한다. 본인은 극우주의자가 아니라고 하지만 아베의 성향은 늘 뼛속 깊이 극우주의였다. 신사를 거침없이 참배하면서 ‘우리 것을 우리가 참배하는데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식의 사고를 한다. ‘전범자 혹은 전범 기업의 개념은 바깥세상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며 과거 일일뿐’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각자도생인 세상이라는 게 아베식 사고다. 

극우주의자들은 늘 나라를 먼저 생각한다. 나라 안에는 국민이, 국민 안에는 개인이 있고, 그 개인들은 나름의 개성과 인권이 있지만 극우주의자들은 인권보다는 나라를 먼저 생각한다. 그들은 개인의 희생을 불사하는 것이 ‘애국의 발로’라고 한다

그런 아베가 평화 헌법 개정에 몰입하고 있다. 그래야 미국 같은 세계 제일의 국가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는 평화 헌법 때문에 야심을 펼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법 개정을 본인의 집권기 안에 완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있다. 그런 그에게 트럼프의 행동 하나하나, 말 한마디는 매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뭐든지 시원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 아베는 마치 트럼프가 된 듯이 준동한다. 불안한 글로벌 정세에 국민들은 자신처럼 확신을 가진 지도자를 더 사랑하게 될 것이니 일단 지르고 보자는 심산이다. 미국도 그러고 있으니 정답이 있는 행동이라고 확신한 듯 보인다.

아베의 이런 생각은 최근 동북아 정세에서 왕따 신세로 전락하고, 늘 애정 하던 미국도 어느덧 일본에 소홀하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은 기다리면 안 된다는 확신으로 굳어졌다. ‘아시아의 트럼프’ 아베는 드디어 자기 자신을 스타 대열에 올릴 한방을 날린다.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에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다. 한국은 왜 지금까지 이 수혜를 입고 있던 걸까. 아시아 유일무이한 화이트리스트 대상 국가였기 때문에 제외해도 뭐라고 할 명분은 딱히 없다. 지난해부터 아베가 이 점을 언제 터트릴까를 고민해왔다. 만약 미중 사태와 북미 사태에서 일본의 역할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카드를 꺼내지는 않지 않았을까.

이재용 부회장이 133조를 투자해 2030년 시스템 반도체 1위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강조하지 않았더라면 아베는 좀 더 참았을까. 한국 바이오 기업들이 무섭게 임상을 마치고 신약을 출시하지 않았더라면 아베는 좀 더 참았을까. 현대차가 수소차를 출시하고 ‘돌격 앞으로’를 외치지 않았다면 아베는 좀 더 인내했을까. 한국 배터리 3사가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시장을 장악해가지 않았더라면 아베는 느긋하게 기다렸을까.

아베는 한국이 철강이나 조선도 자국 기술을 베끼더니 결국 그대로 가져갔고, 잘 나가는 반도체도 일본 것을 베낀 것이었는데 결국 따라잡혔다고 생각한 것이다. 가전도 마찬가지고, 정보통신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마 한국의 베끼는 기술에는 경계심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본만의 고부가가치 기술인 기계와 부품, 소재를 한국이 대신해 팔아주며 엄청난 이익을 일본에게 안겨다주니 그동안은 참을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내버려 뒀다간 잡아먹히겠다’는 조바심에 사로잡힌 듯 보인다.

아베를 괴롭힌 또 다른 배경은 한국 기업들이 놓인 상황이다. ‘패스트 팔로워’로 잘 나가던 한국 기업들이 이제는 ‘퍼스트 무버’로 세계 무대에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나 한국 기업은 내부와 외부를 막론하고 어느 곳에서도 지원을 전혀 받지 않는 가운데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식’으로 미래 경쟁력을 챙기고 있으니 당연히 더욱 무서울 수밖에 없다. 아베의 조바심은 이렇게 시작됐다. 아베는 이 상황을 방치하면 일본은 영원히 하등 국가로 내려앉을지 모른다는 중압감을 느끼고 있다.

아베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가상 시나리오다. 만약 이번 일본의 보복 사태가 이런 배경에서 시작됐다면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해법은 와신상담밖에 없다. 불가항력의 절대시간을 벌어야 되받아 칠 수 있는 사건이다. 현재의 고통을 조용히 되갚음해 줄 방법은 실력을 오래도록 쌓아가는 것 뿐이다. 며칠 전 원론적(?) 수준으로 5년 이내에 기술력을 따라잡자고 발표했던 대책에 대해 정부 관료와 정치인들은 책임 완수로 이날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야말로 인증샷을 찍어 국민에게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약속을 지켜야 한다. 또 이벤트성으로 반짝 발표였구나라는 말을 들어서는 절대 안된다. 왜 5년인가. 3년 뒤 혹은 2년 뒤라도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해놔야 한다. 물론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번 대국민 약속은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여야를 막론하고 힘을 합쳐 지켜나가야 한다. 그래야 극단주의가 판치는 글로벌 경제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기회는 다시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