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조, 227.3×181.8㎝, 1991

송수련 작품에서 이성의 역할은 미적 감성을 회화적인 표현으로 이끌어 내는 촉매의 위치에 선다. 그에게서 이성의 통제력 상실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처럼 여겨진다. 꽉 짜여 전 화면의 구조적인 논리성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어쩌면 그의 작품에서 감상은 이성의 지배하에 있는 것처럼 보이 기도 한다. 자유로운 감성의 표현성이 현저하게 억제되고 있음이 감지되는 것이다. 구상 및 추상적인 이미지라든가, 그 같은 이미지를 엮기 위해 가해지는 발묵에 의한 표현과, 또는 보다 구체적이고 의도적인 형태 묘사 등에서 확인되는 감성의 흔적은 적지 않다.

하지만 이미지의 절제와 그로 인한 긴장감은 여전히 감성의 폭을 좁혀놓고 있다. 이는 표현의 전개과정에서 독자적인 형식논리의 필연성을 내세우는 데 기인한다. 이미지의 중첩이라는 감성의 자율성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한 화면구조가 이에 대한 답을 던지고 있다,

그림은 최종적인 순간까지 만들어지는 것」임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그는 표현의 우연성 등에 의해 이루어져 가는 그림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성에 근거하되 구체성을 상실한 이미지의 전개는 어쩌면 감성의 순도를 높이려는 의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성적인 해석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는 형식논리로 인해 감성의 활동영역은 축소된다. 제한적인 이미지의 표현, 즉 구체적인 표현의 절제는 그의 감성이 이성에 의해 통제되고 있음을 반증한다. 사실적인 형태를 왜곡하거나 극히 단순화시킬 경우 형태에의 구속력에서 벗어날 수 있으므로 검성은 보다 자유롭다는 일반적인 관점과 상치되는 것이다.

 

이 같은 송수련의 형식논리는 어쩌면 화면의 구조적인 완벽을 추구하는 작가적 태도에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가 설정한 형식에 딱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완결성, 또는 완벽성에 감성을 감금하고 있다고나 할 이러한 형식논리는 초기부터 오늘까지 일관되고 있다.

그러기에 그 색채는 극히 억제된다. 검정색과 황갈색·적갈색·청회색 등 지적인 색채감정에 익숙해 있지 않으면 얼른 친숙해지기 어렵다. 하지만 그림이 반드시 감성의 자극에 의한 쾌감만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감성적인 이해보다는 작가자신이(宋秀璉,한지화가 송수련,송수련 화백,SONG SOO RYUN,송수련 작가,Hanji Painter SONG SOO RYUN,종이회화 송수련,한지작가 송수련,KOREA PAPER ARTIST SONG SOO RYUN, KOREAN PAPER ARTIST SONG SOO RYUN)주관하는 사유의 세계에 접근했을 때, 거기에는 감성만으로는 전달되지 않는 높은 정신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음을 감지하는데서 또 다른 미적 쾌감을 맛볼 수 있다.

△신항섭(申恒燮)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