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한일 경제전쟁이 묘한 정국으로 빠져들고 있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진검승부에 나설 것으로 보이던 일본이 갑자기 숨 고르기에 돌입하며 사태를 관망하는 분위기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일각에서 일본이 미국의 중재 의지 및 글로벌 전자 ICT 공급망 붕괴에 대한 우려, 한국의 반일감정에 부담을 느껴 시간끌기에 돌입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으나 ‘확전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있다는 평가다.

일본의 숨 고르기

일본이 지난달 4일 한국을 겨냥해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3대 소재 수출 제한 조치를 시작한 후 2일 각의를 통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했다. 이어 7일 한국이 일방적으로 국제조약을 파기했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화이트리스트 확정안이 담긴 정령(한국의 시행령)을 공포, 관보에도 게재했다. 한국이 화이트리스트인 그룹A에서 배제되는 시일은 28일로 정해졌다.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국내 재계에서는 향후 후폭풍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위기다. 일단 일본이 1100여개 물품을 대상으로 동시에 수출 규제를 걸 가능성은 낮다. 또 그룹A 제외가 모든 수출을 막는 조치도 아니다. 그러나 일반포괄허가와 캐치올 규제 제외 혜택이 모두 사라져 수급 자체가 어려워진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특히 일반포괄허가는 수입국이 한 번 허가를 받으면 향후 3년간은 특별한 규제를 받지 않는 자격을 주기 때문에, 이 제도가 폐지되면 한국 기업은 앞으로 소재 수입 시 개별허가를 받아야 한다. 당연히 시간과 비용이 크게 소모된다. 일반포괄허가와 캐치올 규제가 시작되면 수입국 입장에서는 건별로 일본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 하며, 이 마저도 일본 정부의 정치적 결정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 심지어 1100여개 물품 중 어떤 물품에 대한 수입 제한 조치가 걸릴지 예상할 수 없고, 또 다변적이기 때문에 대응 자체가 불가능하다.

다만 일본이 정령을 발표하면서 시행세칙 내용을 구체적으로 발표하지 않은 장면에 시선이 집중된다. 지난달 4일 수출 규제에 들어간 불화수소나 포토레지스트 등 3대 핵심 소재 외 어떤 물품을 개별허가에 포함시키는지 적시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여기에 특별일괄포괄허가제도가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CP, 즉 법령준수 자격을 받은 기업은 수출 상대 국가가 그룹A에 속하지 않아도 물품에 대한 개별허가를 거치지 않고 3년간 바로 물품을 조달할 수 있는 제도다. 이 제도를 잘 활용하면 일본의 수출 규제 타격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에 돌입하면서도 시행세칙 내용을 명확하게 발표하지 않았고, 특별일반포괄허가제도의 ‘틈’이 발견되는 순간이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흐름을 두고 “일본이 확전을 바라지 않는 것 아니냐”는 낙관적인 전망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확전? 극적인 타결?

일본은 G20이 종료된 후 한국을 향한 경제보복에 나섰다. 최초 아베 내각의 참의원 선거용이라는 주장이 나왔으나, 일본은 2일 각의를 통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하면서 사실상 전면전 양상으로 치달았다. 

세코 히로시케 일본 경제산업상은 2일 “한국과는 신뢰할 수 없다”면서 “신뢰하며 대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한국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한국에 대한 경제제재가 자유무역주의 부정과는 관련이 없으며, 단지 한국을 믿을 수 없으니 안보상의 이유로 경제제재에 나선다는 뜻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일 오후 2시 임시 국무회의를 열어 일본 각의의 결정을 비판했다. 문 대통령은 “문제해결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거부하고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대단히 무모한 결정으로, 깊은 유감을 표한다”며 “외교적 해법을 제시하고 막다른 길로 가지 말 것을 경고하며, 문제해결을 위해 머리를 맞대자는 우리 정부의 제안을 일본 정부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이어 “앞으로 벌어질 사태의 책임도 전적으로 일본 정부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경고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지금의 도전을 오히려 기회로 여기고 새로운 경제 도약의 계기로 삼는다면 우리는 충분히 일본을 이겨낼 수 있다”면서 “우리 경제가 일본 경제를 뛰어넘을 수 있다. 역사에 지름길은 있어도 생략은 없다는 말이 있다. 언젠가는 넘어야 할 산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멈춰 선다면, 영원히 산을 넘을 수 없다. 국민의 위대한 힘을 믿고 정부가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이후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공격을 받은 한국이 주로 본격적인 공세의 키를 잡았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주재한 일본 수출규제 대응 관계장관회의를 통해 “수출제한 3대 품목을 포함한 총 100개 전략 소재 품목을 지정해 집중적으로 투자, 5년 내 공급안정을 이루겠다”고 밝혔다. 또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정부서울청사에서 긴급 브리핑을 열고 “100대 품목의 조기 공급 안정성을 위해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겠다”면서 “20대 품목은 1년 안에, 80대 품목은 5년내 공급을 안정화시키겠다”고 공언했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폐지 카드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문 대통령은 7일 오후 국내 최초로 로봇의 팔다리 관절 역할을 하는 핵심 부품인 정밀 감속기 개발에 성공한 업체를 방문하며 ‘소재 국산화 의지’를 강조하기도 했다.

다만 일본의 반응은 2일 각의 발표 후 명확하게 나오지 않았다. 일본 외무성 차관급인 사토 마사히사(佐藤正久) 일본 외무 부(副)대신이 문 대통령이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결정을 비판하자 “무례하다”는 SNS 글을 올려 물의를 빚는 등 격한 반응이 나왔으나, 그 이상 구체적인 제재 로드맵은 등장하지 않았다. 7일 관련 정령을 발표하면서도 세부적인 내용은 발표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일본이 사실상 확전자제에 나서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관심을 끄는 것은 미국의 중재 의지다. 미국은 한일 경제전쟁 초반 적극적인 중재의지를 보이지 않았으나, 최근 기류가 변하고 있다는 평가다.

특히 한국의 반도체 등 중간재 수출이 흔들릴 경우 글로벌 ICT 공급망이 위험하다는 주장까지 나오자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싱크탱크인 미국기업연구소는 컬럼을 통해 “한일 과거사와 관련해 한쪽 편을 들겠다는 것은 아니다”면서 “일본의 수출 규제는 파괴적인 보복의 방식”이라고 규탄했다. 나아가 일본의 제재로 삼성전자 및 SK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 인프라가 붕괴되면 글로벌 전자 공급망에 차질이 생긴다고 경고하는 한편 반사이익을 얻을 것으로 보이는 화웨이를 거론하며 “삼성전자는 화웨이가 아니다”고 말했다. 미국기업연구소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속한 공화당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세계적인 신용평가사인 S&P도 일본의 제재를 비판하고 나섰다. 숀 로치 S&P 아시아-태평양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IT산업에 정치논리가 적용되면 생태계가 파괴될 수 밖에 없다”면서 “일본 정부의 조치는 한국의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물론 일본의 도시바와 파나소닉에게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러한 우려에 미국도 더 이상 한일 경제전쟁을 좌시할 수 없다는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도 변수다. 

지난달 30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미중 무역협상이 사실상 빈손으로 끝나며 미국과 중국은 사실상 정면충돌로 나아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결렬 직후 트위터를 통해 내달 9월 1일부터 3000억달러 규모의 중국산 제품에 10%의 관세를 매길 것이라 밝혔으며, 중국은 이에 대비해 미국산 농수산품 수입 제한에 나서는 분위기다. 나아가 미국은 위안화 환율이 11년만에 시장의 심리적 저지선인 달러당 7위안을 돌파하자 중국을 즉각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해 확전을 불사하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이 통화전쟁으로 번지는 가운데 내년 재선을 앞 둔 트럼프 대통령을 대상으로 중국이 ‘시간끌기’에 나서고 있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중거리핵전력 조약(INF) 폐지를 둘러싼 논란도 점입가경이다. INF 폐지 후 마크 에스퍼미 국방부 장관은 “신형 정밀유도 중거리 미사일을 아시아 동맹국에 배치하고 싶다”고 말했고, 유력한 후보지로 한국이나 일본이 거론되고 있다. 중국 환구시보는 즉각 “한국과 일본은 중국과 러시아 미사일이 겨냥하는 밀집 표적이 되지 말아야 한다”면서 강력하게 반발했다.

미중 무역전쟁이 통화전쟁, 나아가 국방 및 안보 패권 문제로 급격히 번지며 미국에서는 한일 경제전쟁을 방치할 경우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반론이 힘을 얻고 있다는 평가다. 그 연장선에서 ‘전쟁’을 시작한 일본이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의 중재와 더불어, 일본이 계속 경제보복에 나설 경우 자국 산업 생태계가 흔들리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실제로 일본은 외교적 현안을 경제보복으로 풀어냈다는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이는 글로벌 시장에서 신뢰도에 큰 타격을 받는 요인이 되고 있다. 추후 일본의 제재에 자극을 받은 한국이 시간이 걸려도 제3국을 통한 부품 및 소재 수급에 성공하거나 극단적인 탈일본 로드맵을 현실화시키면 일본의 경제 기초체력은 파탄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패턴이 반복될 경우 아베노믹스의 실패로 궁지에 몰린 아베 내각은 초유의 위기와 직면할 수 있다는 평가다. 여기에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본제품 불매운동 등 ‘발 밑의 우려’도 점점 커지고 있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이 7일 정례 브리핑을 통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것을 두고 “경제보복이 아니다”면서 “한일관계에 영향을 주는 것을 의도한 게 아니다”는 입장을 재차 되풀이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일 경제전쟁을 일으킨 후 일본이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메시지지만, 이 역시 확전자제의 시그널 중 하나로 여기는 분위기도 있다.

아직은 안심할 수 없다는 주장도 만만치않다. 일본이 28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겠다는 기본적인 입장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연장선에서 일본이 한국의 대응을 보면서 추가공격에 나설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기본적인 제재기조는 유지하면서도 한국의 반응에 따라 제재방식에 변화를 줄 것이라는 뜻이다. 7일 ‘모호한 가이드 라인’이 확전자제의 의지가 아니라, 한국의 대응을 보면서 유연한 공격을 시도하겠다는 의지로 봐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일본이 더 확실한 공격을 염두에 두고 정밀타격을 위해 숨 고르기에 나서고 있는 논리다.

일각에서는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면서도 특별일괄포괄허가제도와 같은 ‘숨구멍’을 트여주는 방식에 나설 가능성도 제기한다. 나아가 28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기 전에 전격적인 타협의 결단을 내릴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는 큰 틀에서 일본의 공격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일본은 여전히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3대 소재 수출길을 막고 있으며, 이는 한국 경제의 급소다.

충격에 대비하라

한일 경제전쟁이 치열한 복마전으로 흘러가며 다양한 해석과 전망이 나오고 있다. 현 상황으로는 최선과 최악의 시나리오 모두 염두에 둬야 한다는 주장이 중론이다.

홍 부총리를 비롯해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최종구 금융위원장, 윤석헌 금융감독원장은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거시경제금융회의를 열어 긴급 상황을 공유했다. 이 자리에서 홍 부총리는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상당히 확대되고 있지만 “다양한 옵션이 있다”는 말로 시장의 불안을 잠재우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부는 또 8일 열리는 일본 수출규제 대응 관계장관회의를 통해 일본을 우대국에서 제외하는 ‘전략물자수출입고시 개정안’을 안건으로 올려 맞대응한다는 방침이다.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한 상태에서 세부내용을 명확하게 공개하지 않고 한국의 대응을 주시하는 가운데, 한국이 어떤 행보를 보이느냐에 따라 추후 전쟁의 향배가 갈릴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