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미술의 대표 작가 중 하나로 꼽히는 박생광(朴生光, PARK Saeng Kwang, 1904-1985)의 대규모 회고전이 지난 5월 28일부터 10월 20일까지 대구미술관에서 열린다. 전시 개막과 동시에 하루 평균 약 1,500여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며 인기몰이 중이다.

대구미술관은 2011년에 개관했다. 시립미술관으로는 비교적 역사가 짧은 편이지만 쿠사마 야요이(草間彌生, Kusama Yayoi, b.1929), 장샤오강(張曉剛, Zhang Xiaogang, b.1958) 등 블록버스터급 작가들의 전시를 진행하며 관람객 33만 명을 유치하는 등 쾌거를 이룬 바 있다. 이러한 흥행의 이유는 관람객과의 상호 공감을 가능케하는 전시 기획력에 있다.

이번 《박생광》전 역시 작가가 말년에 보여주고자 했던 한국의 민족성을 크게 ‘민속’, ‘불교’, ‘무속’으로 나눠 스토리텔링화로 선보여 관람객들의 상호 공감을 꾀하려 했다. 또한 기존에 공개되지 않았던 박생광 드로잉 80점을 통해 작가로서의 고심과 연구 과정을 느껴볼 수 있게 하였다.

▲ 대구미술관 《박생광》 전시 전경, 2019
© 대구미술관 DAEGU ART MUSEUM (사진=대구미술관 제공)

신미술 즉, 서양화 도입기에 있어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인 곳은 서울, 평양과 대구이다.

대구의 본격적인 활동은 1923년 11월에 열린 대구미전에서 전통회화와 더불어 ‘서양화부’가 설치되면서부터 비롯된다. 그 당시 출품 작가로는 이여성(李如星, 1901-미정), 이상정(李相定, 1897-1947), 황윤수(黃允守), 박명조(朴命祚, 1906-1969) 등이 있었고, 이들은 대구 서양화단을 형성하는 선구자 그룹이 된다. 그 가운데 이상정은 시인 이상화(李相和, 1901-1943)의 친형으로, 대구에서 제일 먼저 이젤과 유화물감 같은 신식 화구를 일본에서 도입하며 신문화운동을 주도한 공로자로 꼽힌다. 미술의 열의를 표명한 이상정을 이어 박명조는 1925년에 첫 서양화 단체전 및 1926년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보다 본격적인 활약으로 대단한 의욕을 보였다.

1920년대 말에는 일본인 화가 중심의 자토회(赭土會)라는 서양화 그룹에 반하여 한국인끼리의 영과회(零科會)를 결성하였다. 이러한 배경 아래 이인성(李仁星, 1912-1950)이라는 대구 화단의 혜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선전(鮮展)을 중심으로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며 연속 ‘특선’에 ‘추천작가’로까지 추천되어 대구미술을 대표했다. 그 당시 선전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던 ‘조선미술전람회’의 약칭으로, 1922년부터 1944년까지 23회를 거듭하며 작가 신인 등용문으로서의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했다. 이인성 다음으로는 선전에 8번 출품한 김용조(金龍祚, 1916-1944)가 있다. 16세의 미성년으로 선전에 진출한 이래 ‘천재화가’라고까지 각광을 받으며 좋은 작품을 발표하다가 일제 말에 29세로 요절한 비운의 화가였다.

이 밖에도 황술조(黃述祚, 1904-1939), 주경(朱慶, 1905-1979), 손일봉(孫一峰, 1906-1985), 서진달(徐鎭達, 1908-1947) 이쾌대(李快大, 1913-1965), 정점식(鄭點植, 1917-2009) 등 한국 근현대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가들을 배출했다.

대구 미술은 1960~70년대 한국 근대미술의 산실(産室)이자 본류(本流)로서 맥을 이었으며, 김창락(金昌洛, 1924-1989), 변종하(卞鐘夏, 1926-2000), 김구림(金丘林, b.1936), 곽훈(郭薰, b.1941) 등 수많은 인재들이 그 뒤를 잇는 화단으로서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미술사적 의의를 갖는다.

▲ 대구미술관 《박생광》 전시 전경, 2019
© 대구미술관 DAEGU ART MUSEUM (사진=대구미술관 제공)

대구미술관 김혜진 학예연구사는 2021년 개관 1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 근대미술과 대구 화단’을 주제로 대규모 전시를 마련할 것이라며, 대구 근대화단의 재조명 계획을 밝혔다. 나아가 대구 지역 작가 발굴뿐만 아니라 국내 미술사적 의미 있는 키워드 및 주제, 국제적 입지가 형성된 아티스트 등의 전시 기획을 통해 동시대적 세계 미술의 동향을 살피고, 대구 시민들에게 다양한 시각예술 향유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이에 일환으로 한국 근현대미술의 채색화 및 민중미술의 정신 등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박생광을 재조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적 채색: 그대로 박생광

①학습기: 일본 유학 및 활동(1920-1944) ②모색기: 경남 진주에서 공백기(1945-1966) ③실험기: 서울 상경(1967-1977) ④확립기: 그대로(乃古, 내고) 화풍 (1977-1982) ⑤절정기(1982-1985)

▲ 박생광, 청담대사 Saint Cheongdam, 종이에 수묵채색 Ink and color on paper, 119×83.8cm, 1980년대
© 대구미술관 DAEGU ART MUSEUM (사진=대구미술관 제공)

박생광은 1904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한문서당에서 4년간 공부하고 열한 살 때 진주보통학교에 입학, 진주농고를 마칠 때까지 줄곧 고향에서 성장했다. 이때 한국 ‘불교계의 거인’인 청담 스님(靑潭, 1902-1971)을 만나게 되는데, 오늘날 박생광의 작품에 나타나는 불교적 성향은 이와 같이 어린 시절부터 유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923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시립회화전문학교(京都市立繪畵專門學校, 지금의 교토예술대학)에서 근대교토파(近代京都派) 다케우치 세이호우(竹內炳鳳), 무라카미 가가쿠(村上華岳) 등에게 근대적인 감각의 신일본화를 습득했다. 박생광은 일본 체제 기간에 《명랑미술전(明朗美術展)》, 《대일미술전(大日美術展)》, 《일본미술원전(日本美術院展)》,《신미술인협회(新美術人協會)》에서 입선하는 등 작업적 역량을 꾸준히 키워나갔다. 이 밖에도 1930년 제9회, 1931년 제10회 선전에 출품하여 연속적으로 입선했다. 그 이후 박생광은 선전에 더 이상 출품하지 않았을뿐더러 1937년 강숙희 씨와 결혼하기 위해 일시 귀국한 것 이외에는 귀국할 때까지 줄곧 일본 화단에서만 활동을 했다.

▲ 박생광, 단군 Dangun, 종이에 수묵채색 Ink and color on paper, 67×42.7cm, 1970년대
© 대구미술관 DAEGU ART MUSEUM (사진=대구미술관 제공)

해방을 앞둔 1945년, 박생광은 42세의 나이로 고국에 돌아왔다. 해방 이후의 한국 화단은 본능적으로 일본 화풍을 거부했다. 이런 분위기의 영향을 받은 듯 박생광은 진주에서 줄곧 은둔 생활을 하며 재료와 표현기법 등 다양한 모색을 시도했다. 이 시기에 단군사상과 민족정신을 강조한 설창수(薛昌洙, 1916-1998), 구상(具常, 1919-2004), 이병주(李炳注, 1921-1992) 등과 가깝게 지냈다. 여기에 각별한 인연이 있는 청담 스님, 오제봉(吳濟峰, 1908-1991), 변관식(卞寬植, 1899-1976)과 교유(交遊) 하였는데, 모두가 박생광 말기의 민족관, 역사관, 예술관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 박생광, 해질녘 Sunset, 종이에 수묵채색 Ink and color on paper, 137×140cm, 1979
© 대구미술관 DAEGU ART MUSEUM (사진=대구미술관 제공)

1977년 진화랑에서의 국내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전통에 대한 실험이 시작된다. 이미 진주 시절에서부터 민족성에 대한 관심과 한국적인 회화에 대한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었다. 박생광은 한국과 일본의 전통, 그 전통의 정형을 뛰어넘는 자신만의 지표를 구가해야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30여 년 동안 배우고 활동해온 ‘일본적 유산’들을 청산하기 시작했고, 고구려 벽화, 신라의 기와문양, 나비, 출토유물 등 각종 한국적 소재들을 한국의 문양, 문창살, 단청 등으로 나타냈다. 이 시기에는 박생광만의 한국적 회화로의 변신을 엿볼 수 있다.

▲ 박생광, 무당 12 Shaman 12, 종이에 수묵채색 Ink and color on paper, 136×139cm, 1984
© 대구미술관 DAEGU ART MUSEUM (사진=대구미술관 제공)

“역사를 떠난 민족이란 없다. 전통을 떠난 민족은 없다. 모든 민족예술에는 그 민족 고유의 전통이 있다.” –박생광

박생광에게 민족성이란 한국의 오랜 역사 동안 크게 자리 잡고 있던 불교, 나아가 무속신앙, 서민 문화를 대변할 수 있는 민화적 요소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특히 샤머니즘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은 ‘국풍81(한국신문협회 주최 및 KBS, MBC 방송사가 행사 운영을 맡아 1981년에 개최한 대규모 문화행사)’에서 당시 김금화 무당의 신들린 듯한 춤사위에 매료되었고, 이것을 예술로 승화시키기 시작했다.

박생광은 한국적 색채를 창조하였다. 강한 에너지를 내재하고 있는 오방색(五方色) 중심의 원색과 주황색 윤곽선을 사용했다. 오방색에서 중앙(中央)을 의미하며 '황(黃)'에 해당하는 주황색은 무속적 느낌을 포함하는 동시에 자칫 난잡하고 혼랍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화면 전체를 제어하여 통일성을 주는 역할을 한다. 강렬한 오방색류의 색을 사용한 이유는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단청, 고려시대의 불화, 조선시대의 민화, 무신도 등의 색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한국의 민족인 기층민들의 삶, 가장 서민적인 색채라고 생각했다. 박생광의 색채는 당시 미술계의 색채관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하였으며, 우리 전통 색채의 면모를 화려하게 펼쳐 보임으로써 평론가들의 주목은 물론 미술사적으로도 한 획을 그었다.

▲ 박생광, 무속 12 Shamanism 12, 종이에 수묵채색 Ink and color on paper, 134.6×135.8cm, 1985, 부산시립미술관 소장
© 부산시립미술관 Busan Museum of Art (사진=대구미술관 제공)

자유로운 화면구성과 색채는 박생광의 회화만이 갖는 가장 중요한 생명력이다. 거기에 수묵을 겸하는 표현기법이 더해져 그대로 화풍이라 일컬어지는 새로운 경지의 독자적인 한국적 채색화가 탄생했다. 그대로 화풍은 그 당시 일본화와 완전히 다른 것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미술에서도 이처럼 파격적이고 대담한 시도는 없었다. 탈일본화를 넘어 한국 중심화단과 거리를 두며 기존의 형식을 탈피한 독자적인 경지의 박생광의 작품은 미술사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 박생광, 노적도(老笛圖) No Jeok Do(old flute player), 종이에 수묵채색 Ink and color on paper, 138.5×140cm, 1985
© 대구미술관 DAEGU ART MUSEUM (사진=대구미술관 제공) 
최고운 큐레이터=‘피리를 부는 노인’이라는 뜻의 본 작품은 배경을 수묵으로만 처리하여 다른 작품들에 비하여 절제미와 초탈의 심경이 느껴진다. 박생광이 타계 전까지 붓질을 했던 절필(絕筆) 작이다.

박생광은 1984년 후두암 선고를 받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에 집중한 역사화 시리즈를 제작했다. <명성황후>,(1983), <전봉준>(1985), <역사의 줄기>(1985) 등 대표 작품을 남긴 채, 1985년 7월에 생을 마감한다.

박생광은 우리나라 20세기 역사의 격변을 살다 갔다. 무엇보다도 작가의 예술세계는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막대한 영향을 받아온 유럽과 미국, 일본 등의 미술사 흐름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고대사와 근대사, 그리고 현실에 집중했다. 특히 말년에 남긴 역사화 시리즈는 서민 중심의 역사관과 민족의 비애와 항의를 소재로 했다. ‘단순 기록화’가 아닌 고발의 의지를 웅변하듯이 극적인 장면들을 현대적 시각으로 표현한 것은 한국 미술에서 중요한 위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 박생광, 토함산 해돋이 The Sunrise of Toham Mountain, 종이에 수묵채색 Ink and color on paper, 74.5×76cm, 1980년대
© 대구미술관 DAEGU ART MUSEUM (사진=대구미술관 제공)

한국의 근대역사는 일제강점기의 압제와 전쟁의 아픔이 공존한다. 국권을 빼앗겼으며 역사 단절의 슬픈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문화예술 또한 그 흐름을 함께 하였다. 한국 근대미술은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제한 속에서도 우리들의 신미술을 ‘꽃’ 피워냈다. 그리고 그 ‘꽃’은 정신적인 토양이 없이는 더욱 단단한 뿌리를 내릴 수 없고, 성장할 수도 없을 것이다.

문화예술은 그 시대가 처한 상황을 반영한 역사적 내지는 시대적 산물로, 필연성과 가치를 지닌다. 이에 따라 한국 근현대미술 재정립은 21세기 국제화에 따른 한국 현대미술의 미학적 정체성을 점검하기 위한 기초적이며 가장 중요한 단계라 하겠다. 다시 말해 한국 근현대미술 1세대의 선구적 정신과 그 후세대가 만들어놓은 문화예술을 통해 한국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전통 미학적 담론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K미술’이 세계 컨템포러리 아트와 같은 흐름을 타기 위해서는 우리만의 주체적인 역량이 반드시 있어야 발돋움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 최고운 학고재 큐레이터

<참고 문헌>
1. 『예술과 비평』, 유홍준, 1984
2. 「박생광 예술의 특징과 미술사적 평가」, 최병식, 2010
3. 「박생광 회화의 시기구분과 대표적 경향연구」, 최병식,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