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일본 정부가 2일 각의를 열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했다. 지난달 4일 한국을 대상으로 3대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수출규제에 돌입한 후 추가적인 경제보복 카드를 빼든 셈이다. 시행은 23일이 유력하며 최장 100일의 심사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예정된 일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1일 산케이신문 등 일본 언론에 따르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아마리 아키라 자민당 선거대책위원장은 “일본 정부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할 것”이라면서 “확률은 100%”라고 공언한 바 있다. 교도통신 등 현지 언론도 1일 밤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어딜 노리나
일본이 한국에 대한 화이트리스트 배제를 바탕으로 노리는 것은 '미래 먹거리'라는 주장이 나온다. 지난달 4일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에 대한 타격은 맛보기에 불과하며, 장기적 관점에서 한국 경제의 미래를 압박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의 제재가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정조준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은 지난달 4일부터 3대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수출 제재를 시작했으나 이는 전면 금지가 아닌 수출 공급선 조절에 머물러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화이트리스트 배제는 차원이 다르다. 안보상의 이유를 들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순간 대부분의 수출 판로가 막힐 수 있기 때문이다. 업계별로 상황은 다르지만 약 1000여개 품목의 수출 판로가 막힐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당장 한국의 반도체 인프라는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다. 한국무역협회 자료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한국이 수입한 평판디스플레이의 74%가 일본에서 왔으며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부가 장비 65%도 메이드 인 재팬이다. 반도체 설비의 필수품인 실리콘웨이퍼도 50% 이상 일본에 의존하고 있다. 이 물량이 막히면 한국 경제는 말 그대로 흔들리게 된다.

더 큰 문제는 '고통의 조절'이다. 업계에서는 일본이 한국을 대상으로 화이트리스트 배제에 나서면서 모든 품목에 대한 수출 금지를 시도할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다만 특정 분야의 수출길을 유동적으로 막거나 풀어주는 방식으로 상황을 주도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일본은 1000여개 품목 중 몇 개의 품목을 번갈아 가며 한국의 산업 인프라를 공격할 수 있고, 경우의 수는 무한대에 가깝다. 사실상 대응 카드를 쓰지 못하는 셈이다.

공작기계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수치제어반(CNC), 고전압용 콘덴서도 규제에 걸릴 전망이다. 스마트폰 제조를 위해 필수적인 MLC도 공격 대상에 들어가기 때문에 국내 전자업계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삼성전자 및 LG전자, SK하이닉스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유다.

배터리 및 수소전기차 등 다양한 영역에서 연쇄적인 파국이 찾아올 가능성도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공포가 현실이 될 경우 화학·기계·자동차 부품·비금속 등 48개 주요 품목에서 엄청난 후폭풍이 예상된다. 배터리의 경우 단기적인 타격은 제한적이지만 파우치 필름이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 전량을 일본에서 수입하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A급 파우치를 생산하는 기업은 일본 DNP와 쇼와덴코뿐이며, 최근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삼성SDI는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 국내 제조사들과 연이어 접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동차 및 정유, 철강도 장기적 관점에서는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다. 특히 자동차의 경우 국산 부품화 비율이 90% 이상이지만 탄소섬유 등 기반 품목은 여전히 일본에 의지하고 있다. 탄소섬유의 경우 어느정도 국산화 기술을 가동할 수 있으나 당장 공정에 도입하려면 테스트만 6개월이 걸리는 것으로 확인됐다. 화학 및 연관 공업의 일본 수입의존도는 99%에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다.

커지는 우려
일본의 전방위적 압박이 계속되는 가운데 우려도 커지고 있다. 카트리나 엘 무디스 애널리틱스 이코노미스트는 "한국과 일본 간 분쟁이 몇 달 동안 지속한다면, 전 세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도 일본의 제재가 이어질 경우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술기업 신용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이 (한국에 대한 소재)수출을 중단하면 그 고통은 전 세계 기술 공급망으로 파급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WSJ도 "자유무역의 챔피언인 일본이 트럼프의 각본을 따라하고 있다"며 "일본이 기술 수출을 외교적 분쟁의 무기(weapon)로 사용하면 상호 연결된 세계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내 기업들도 초비상이다. 당장 삼성전자는 신규 메모리 반도체 공장인 평택 P2 설비 투자 시기를 내년 1분기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올 하반기에 예정돼 있던 투자였으나 반도체 시황 부진과 미중 무역 분쟁을 비롯해 한일 경제전쟁 등으로 인해 투자를 미룬 셈이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내년 1분기에도 실제 투자를 할 수 없다는 말도 나온다.

삼성전자는 이미 컨틴전시 플랜도 가동했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달 협력사들에 공문을 보내 일본산 소재 및 부품 비축분 90일치 이상을 확보해달라고 요청했다. 만약 협력사들이 재고 확보와 관련해 보관비 등 비용이 발생할경우 이를 삼성전자가 책임지겠다는 의지도 보였다. 나아가 물량이 예상처럼 소진되지 않아도 그 부담은 온전히 삼성전자가 책임지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어 비상영경체제로 돌입하며 충격에 대비하고 있다.

SK하이닉스도 1분기 낸드플래시 감산을 선언한 후 최근 D램 감산 카드도 꺼냈다. 당장 생산 캐파(CAPA)를 4분기부터 줄일 예정이다. 최근 성장세에 있는 CIS(CMOS 이미지 센서) 사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하반기부터 이천 M10 공장의 D램 캐파 일부를 CIS 양산용으로 전환한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D램 미세공정 전환에 따른 캐파 감소 영향이 더해져 내년까지 D램 캐파는 지속적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미국의 마이크론도 D램 감산에 돌입한 상태다. 투자 연기도 당장의 위기 극복을 위한 카드다. 청주 M15 공장의 추가 클린룸(Cleanroom) 확보와 내년 하반기 준공 예정인 이천 M16 공장 장비반입 시기도 수요 상황을 고려하며 재검토할 계획이다. 내년 투자금액도 올해보다 상당히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