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슨 존슨 총리의 취임

결국 보리스 존슨 총리가 제77대 영국 총리로 취임했다. 결국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어차피 될 사람이 드디어 총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될 일은 결국 되는 것 같다.

2016년 9월, 데이비드 캐머론 전 총리의 사퇴로 공석이 된 집권 여당 보수당 전당대회. 당시 존슨 총리는 유력한 총리 후보였다. 하지만 최측근이었던 마이클 고브 전 법무부 장관이 폭탄선언을 했다. “보리스 존슨은 총리가 될 자격이 없는 자이다!”

그로 인해, 존슨은 전당대회 불출마를 선언했다. 개인적 충격도 컸겠지만, 영국 사회가 더 혼란이었다. 브렉시트를 주도하던 여당 지도자가 총리가 될 자격이 없다니? 영국은 브렉시트가 문제가 아니라, 브렉시트를 주도할 총리 선출이 더 큰 문제였다.

어쨌든 존슨 대신 테리사 메이 총리가 취임했다. 그리고 존슨은 메이 총리 내각의 외무장관을 역임했다. 물론 상황은 좋지 않았다. EU 탈퇴를 최대한 늦추며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메이 총리와 하드 브렉시트를 주장하는 존슨이 충돌하는 상황이 잦았던 까닭이다. 2018년 7월, 존슨은 입각 2년 만에 외무장관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2019년 7월, 메이 총리는 2년 10개월 만에 물러났다. 의회에서 브렉시트 승인 투표를 통과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자리를 존슨 총리가 물려받았다.

3년 전 취임했다면, 존슨 총리는 메이 전 총리의 전철을 밟았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반대로, 3년 늦게 취임해서 더 어려운 상황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3년 늦은 취임이 존슨 총리에게 약이 될까, 독이 될까? 아니 그것은 영국에게 득일까, 실일까?

 

런던 위인전과 처칠 팩터

존슨 총리는 2008년 5월부터 2016년 5월까지 8년간 런던 시장을 역임했다. 최근 100년간 재임한 역대 영국 총리 중에서, 런던 시장 출신은 존슨 총리가 유일하다. 1937년부터 1940년까지 3년 재임한 제60대 아서 네빌 체임벌린 총리가 1915년부터 1918년까지 버밍엄 시장을 한 기록은 있지만, 하원의원 출마 전의 일이었다. 의원 내각제 국가 영국에서 총리가 되려면, 하원의원을 하며 각료가 되는 것이 정통코스이다.

존슨 총리는 1997년 하원의원 선거에 처음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이후 4년 뒤 2001년 하원의원 선거에서는 당선해서, 37세 나이로 하원의원이 되었다. 이후 2008년에 런던 시장 선거에 출마했고, 노동당의 켄 리빙스턴 시장을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재선 하원의원에서, 런던 시장으로 도약한 것은 이채로운 일이었다. 런던 시장이 지닌 상징성은 크지만,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진다는 약점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슨 총리는 런던 시장을 선택했다. 그리고 시정 운영의 경험을 쌓았다.

런던 시장 재임 중, 존슨 총리는 대중교통 체계 정리, 주택 보급에 주력했다. 그리고 공용 자전거를 보급했고, 청소년 범죄 줄이기에 앞장섰다. 이와 함께 존슨 총리는 백팩을 메고 자전거 출퇴근을 하는 모습을 보이며, 서민적 이미지를 쌓는데 주력했다.

그런데 런던 시장 재임 중, 언론인 출신 존슨 총리는 주목할 만한 개인적 작업을 했다. 『런던 위인전(Johnson's Life of London null)』(2011)과 『처칠 팩터(The Churchill Factor)』(2014)를 집필한 것이다. 이 책이 의미를 갖는 것은 부제 때문이다. 『런던 위인전』의 부제는 ‘세상을 만든 도시를 만든 사람들(The People Who Made the City That Made the World)’이고, 『처칠 팩터』의 부제는 ‘한 사람이 만든 역사(How One Man Made History)’이다. 존슨 총리의 포부를 확인할 수 있다.

 

윈스턴 처칠과 대영제국

1914년부터 4년간 계속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31개 연합국은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었다. 1919년 6월 28일의 베르사이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 이 조약으로 독일은 해외 식민지를 잃고, 알자스와 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했으며, 유럽 영토를 삭감 당했다. 또 전쟁 도발의 책임을 물어, 전쟁 도발이 불가능할 정도로 감군했다.

그러나 히틀러를 당수로 한 나치스(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는 연합국의 강화조약의 부당성을 강조하며, 독일 부활을 모색했다.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던 독일 국민들은 홀린 듯 나치스의 꾐에 넘어갔다. 그 결과, 1939년 3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945년 8월까지 지속된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와 미국 진주만까지 전선이 확대되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추축국은 강력한 위세로 연합국을 압도했다. 유럽에서는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독일 치하에 들어갔다.

전쟁 초반, 영국은 독일의 전쟁 의도를 간파하지 못해 수세에 몰렸다. 제60대 네빌 체엄벌린 총리가 사임하고, 처칠이 뒤를 이었다. 처칠의 지도력은 대단했다. 처칠은 불굴의 의지로 전쟁을 지휘했다. 참전을 꺼리는 미국을 움직여서 도움을 얻어냈고, 실의에 빠진 영국 국민을 독려했다. 그리고 상황을 반전시켰다. 결국 히틀러를 이겼다.

존슨 총리가 런던 시장 재임 중 집필한 두 책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 처칠. 제61대(1940-1945)와 제63대(1951-1955), 두 차례 총리를 역임한 처칠을 존슨 총리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누차 강조했다. 존슨 총리의 정치적 지향점은 처칠이다.

 

브렉시트 이후의 영국과 유럽 연합

존슨 총리의 국정운영은 어떻게 전망할 수 있을까? 한 마디로 처칠적 세계관의 재연이라 할 수 있다. 처칠은 영국이 독일을 극복해야 유럽 질서가 정립된다고 믿었다. 존슨 총리의 정치 행보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존슨 총리도 독일 투쟁을 선언했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브렉시트는 독일 주도의 유럽연합에 대한 영국의 반대 선언이다. 처칠적 세계관을 가진 존슨 총리의 시각으로 보자면, 유럽연합(EU)은 히틀러의 독일이 승세를 올리던 제2차 세계대전 중반과 같은 상황이다. GDP 3조 6,774억 달러인 독일은 무소불위의 위력으로 28개 유럽연합 회원국에게 전횡을 휘두르고 있다.

GDP 2조 6,224억 달러인 영국은 4위 독일에 이어 5위 국가이지만, 2,000만 명 적은 인구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그래서 독일의 만행에 속수무책이다. 독일은 영국이 감당하기 힘든 과도한 분담금을 요구하고, 지나친 난민 수용을 명령하며, 다른 회원국을 위한 희생을 계속 감내하라고 주문한다. 독일은 영국에 대해서 인정사정이 없다.

존슨 총리는 더 이상 영국이 독일의 명령에 순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노딜 블렉시트는 영국이 독일에 대해서 보이는 분노의 표현이다. 유럽 질서를 흔들던 히틀러를 상대했던 처칠을 마음에 품고, 존슨 총리는 노딜 브렉시트를 주도하고 있다.

유럽연합의 25%를 차지하는 영국은 유럽연합 30% 지분을 가진 독일에게 선전포고했다. 전쟁의 승패는 아직 예측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존슨 총리의 책 『처칠 팩터』의 부제처럼, 브렉시트 승패는 결국 누군가 한 사람이 결정할 것이다.

그 사람은 존슨 총리일까, 메르켈 총리일까? 궁금한 마음으로, 브렉시트를 지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