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한일 경제전쟁이 장기화 국면으로 접어들며 국내 산업 인프라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내 경제의 핵심으로 여겨지는 반도체 인프라까지 큰 위협을 당하는 가운데 IT 소재 국산화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한일 경제전쟁의 핵심을 주시하는 한편, 일본의 제재 이면에 숨어있는 키워드를 읽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국내 산업 일본 의존도 높아...“반전 필요”

일본은 지난 4일 한국을 대상으로 수출 규제에 돌입하는 한편 내달 2일 각의를 열어 일왕이 공표하는 방식으로 추가제재에 착수한다는 방침이다.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한편 제재 품목을 늘려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한국은 속수무책이다. 정치권에서는 연일 일본을 겨냥한 강경발언이 쏟아지는 한편 민간에서는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으나 그 이상의 액션플랜은 보이지 않고 있다. WTO를 중심으로 글로벌 여론전에 들어가는 한편 미국을 움직여 일본의 제재를 막으려는 전략도 채택했으나 지금까지는 성과가 미비하다.

일본의 제재가 생각보다 심각한 파급 효과를 불러올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29일 업계 및 현대경제연구원등에 따르면 국내 산업 전체 수입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14.6%에 이르며 일본 수입의존도 90%를 넘기는 영역도 48개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화학 및 연관 공업의 일본 수입의존도는 99%에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경제의 핵심인 반도체도 위험하다. 일본의 제재가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수출에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메모리 반도체 수퍼 사이클이 종료된 후 국내 반도체 업계가 큰 타격을 받은 가운데, 일본의 기습으로 그 근간마저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이석희 SK하이닉스 CEO가 최근 급하게 일본으로 출장을 간 이유다.

국내 반도체 업계의 업황 악화가 장기화될 조짐도 보인다. 당장 삼성전자는 신규 메모리 반도체 공장인 평택 P2 설비 투자 시기를 내년 1분기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올 하반기에 예정돼 있던 투자였으나 반도체 시황 부진과 미중 무역 분쟁을 비롯해 한일 경제전쟁 등으로 인해 투자를 미룬 셈이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내년 1분기에도 실제 투자를 할 수 없다는 말도 나온다.

SK하이닉스도 1분기 낸드플래시 감산을 선언한 후 최근 D램 감산 카드도 꺼냈다. 당장 생산 캐파(CAPA)를 4분기부터 줄일 예정이다. 최근 성장세에 있는 CIS(CMOS 이미지 센서) 사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하반기부터 이천 M10 공장의 D램 캐파 일부를 CIS 양산용으로 전환한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D램 미세공정 전환에 따른 캐파 감소 영향이 더해져 내년까지 D램 캐파는 지속적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미국의 마이크론도 D램 감산에 돌입한 상태다.

투자 연기도 당장의 위기 극복을 위한 카드다. 청주 M15 공장의 추가 클린룸(Cleanroom) 확보와 내년 하반기 준공 예정인 이천 M16 공장 장비반입 시기도 수요 상황을 고려하며 재검토할 계획이다. 내년 투자금액도 올해보다 상당히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관세청이 22일 7월 1일부터 20일까지의 수출 지수를 공개한 결과, 수출은 283억달러를 기록해 전년 동기 대비 13.6% 떨어졌다고 발표했다. 역시 핵심 수출 효자품목인 반도체의 타격이 심상치않다. 전년 동기 대비 무려 30.2%나 떨어지며 휘청이고 있다. 

승용차와 무선통신기기 및 가전제품은 각각 19.5%, 7.2%, 34.5% 증가했으나 주력은 반도체 수출이 흔들리며 전반적인 흐름이 나빠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일본의 제재로 국내 반도체 및 기간 산업 인프라의 뿌리가 흔들리는 가운데, IT 소재분야 국산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아직 ‘탈’일본을 논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IT 소재분야의 국산화를 이뤄야한다는 주장이 탄력을 받고 있다.

SK머티리얼즈의 행보에 시선이 집중된다. 일본에서 수출규제를 하고 있는 고순도 불화수소(애칭가스) 샘플 생산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애칭가스는 반도체 생산과정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는 공정과 불순물을 제고 하는데 사용된다. SK머티리얼즈 관계자는 “삼불화질소 생산은 우리 회사의 핵심 기술 영역이며 공정 자체가 비슷하고 특수가스를 다룰 수 있는 노하우가 있어 고순도불산화수소 생산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며 올해 말 샘플을 생산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외에도 다양한 가능성 타진이 벌어지고 있다.

아베노믹스 유탄?

한일 경제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상황에서 그 여파가 반도체 및 다양한 산업국으로 번지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일본의 제재 이면에 숨어있는 핵심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아베 내각이 아베노믹스 실패에 따른 후폭풍을 조기에 차단하기 위해 한국을 ‘제물’로 삼았다는 분석이다.

2012년 총리로 선출된 아베 총리는 재정확장 정책을 단행하며 강력한 양적완화 정책을 폈다. 정부가 돈을 풀어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해 경기를 부양하는 아베노믹스다. 그러나 원하던 낙수효과는 등장하지 않았고, 일본 경제는 여전히 침체되어 있다. 

그 연장선에서 한국을 대상으로 경제전쟁을 일으켜 판을 흔들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탈’일본을 염두에 두고 일본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소재 분야의 독립을 장기적 관점에서 추구하는 한편, 유연한 외교적 대응으로 일본의 노림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