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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한 대목] “미국 판사 71.8%가 틀린 초등생 산수문제는?”
   
▲ 법정의 편향을 고발한 헐리웃 영화 '피고인'(1988년). 피해자(조디 포스터)는 집단강간을 당하고도 웨이트리스라는 직업과 사건당시의 야한 옷차림, 음주 사실 등을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 때문에 1심에서는 범인들에게 강간죄 대신 단순폭행 혐의를 물어야 했다.

‘야구방망이와 야구공을 합친 가격이 1.1달러다.
야구방망이는 야구공보다 1달러 비싸다.
그렇다면, 야구공의 가격은 얼마일까?’

2007년 미국 코넬대 법대 교수들이 판사들에게 내놓은 산수문제다. 이 글을 읽는 독자 대부분은 즉각 “0.1달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너무 쉽군”하면서. 하지만 틀렸다. 최고의 엘리트인 판사들도 무려 71.8%나 오답을 써냈다. 만약 야구공이 0.1달러라면, 야구공보다 1달러 비싼 야구방망이는 1.1달러가 된다. 그러면 야구방망이와 야구공을 합친 가격은 1.2달러라는 얘긴데, 이건 문제조건과 다르다. 정답은 0.05달러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심리학자인 대니얼 카너먼은 2011년 출간한 저서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당시 판사들이 정답을 못 맞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의 사고체계에는 두 가지가 있다. 본능에 따라 즉각적으로 작동되는 ‘체계 1번’과 분석적이고 신중하지만 매우 느린 ‘체계 2번’이다. 체계 1번은 오류가 잦은 직관이고, 체계 2번은 심사숙고이다. 인간은 체계 1번의 작동을 피하면서 체계 2번을 통해 사건의 다양한 요인을 신중하게 저울질하여 모든 요소를 논리적으로 결합하는 일에는 영 능숙하지 못하다.’

여러 연구들에 따르면 판사가 판결을 내릴 때 자신도 모르게 불완전한 직관(직감)과 심리적 편향에 의존하게 된다.

마트에서 ‘수프 1인당 12개로 구매제한’이라는 안내문을 붙였다고 생각해보자. 이걸 본 소비자들의 뇌는 ‘12개’라는 숫자를 ‘기준점’으로 삼아 구매할 개수를 조정한다. 1998년 실험에서 이런 안내문을 본 소비자들의 1인당 수프 구매량은 평균 3.3통에서 7통으로 급증했다.

런던대 헤나 프라이 교수는 “기준점 효과(anchoring effect)는 판사들의 판결에도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판사는 검사가 제시하는 기준점(구형량)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한 연구결과 검사가 배상금을 많이 청구할수록 판사도 많은 액수를 지급하라고 명령했으며, 검사가 엄한 처벌을 요구할수록 판결 형량도 올라갔다.

독일 생물학자 에른스트 하인리히 베버는 감각기관이 자극의 ‘변화’를 느끼게 되는 최소한의 자극, 즉 ‘최소 식별 차이(Just Noticeable Difference)’는 맨 처음 자극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일명 ‘베버의 법칙(Weber’s law)’이다. 처음에 강한 자극을 받으면 자극의 변화가 커야 그 변화가 인지된다는 얘기다.

2017년 영국과 호주의 판결문 10만여건을 분석한 연구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피고의 99%가 ‘베버의 법칙’과 일치하는 판결을 받았다. 예컨대, 20년 형을 받을 만한 범죄보다 ‘약간 더’ 심각한 범죄일 경우 판사들은 20년3개월형이 아니라 ‘피부에 와 닿는’ 25년형을 내리고 있었다.

판사들은 비슷한 판결을 너무 연속적으로 내리지 않으려는 심리적 편향도 있었다. 판사가 앞선 4건의 재판에서 피고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면 5번째 재판에서는 불리한 판결이 나갈 가능성이 컸다.

딸을 둔 판사는 여자들에게 호의적인 판결을 내리고, 판사가 응원하는 스포츠팀이 경기에 졌다면 보석신청을 승인하는 비율이 뚝 떨어졌다.

미국에서 진행된 연구들에 의하면 흑인 피고는 백인에 비해 대체로 수감기간이 길고 보석신청 승인율이 낮으며, 사형선고를 받을 확률이 높았다. 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여자보다 남자가 가혹한 처벌을 받았고, 피고의 소득과 교육수준이 낮을수록 형량이 길어졌다.

주태산 주필  |  joots@econovill.com  |  승인 2019.07.29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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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태산, #인공지능, #조디 포스터, #코넬대, #판사, #법원, #판결오류, #편향, #기준점 효과, #베버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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