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한일 경제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일본이 기어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카드를 빼들었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하며 전면전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참의원 선거 후 절반의 성공을 거둔 아베 내각이 한일 경제전쟁을 진흙탕으로 끌고가려는 의도라는 분석이다. 내외부의 우려가 쏟아지는 가운데 미국의 역할론에도 시선이 집중된다.

내달 화이트리스트 배제 유력...'우려'
NHK는 24일 일본 정부가 내달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이미 일본 국민 의견조사에서 1만여건의 의견이 접수됐으며, 대부분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중론인 것으로 확인됐다. 요미우리신문이 지난 22일 설문조사를 한 결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70%를 넘기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일본이 한국을 대상으로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화이트리스트 배제 방침을 발표할 것으로 본다.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면 걷잡을 수 없는 후폭풍이 몰아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4일부터 3대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수출 제재를 시작했으나 이는 전면 금지가 아닌 수출 공급선 조절에 머물러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화이트리스트 배제는 차원이 다르다. 안보상의 이유를 들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순간 대부분의 수출 판로가 막힐 수 있기 때문이다. 업계별로 상황은 다르지만 약 1000여개 품목의 수출 판로가 막힐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더 큰 문제는 '고통의 조절'이다. 업계에서는 일본이 한국을 대상으로 화이트리스트 배제에 나서면서 모든 품목에 대한 수출 금지를 시도할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다만 특정 분야의 수출길을 유동적으로 막거나 풀어주는 방식으로 상황을 주도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일본은 1000여개 품목 중 몇 개의 품목을 번갈아 가며 한국의 산업 인프라를 공격할 수 있고, 경우의 수는 무한대에 가깝다. 사실상 대응 카드를 쓰지 못하는 셈이다.

한국 정부는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이날 오전 10시 정부서울청사에서 "한국 정부의 의견서를 일본에 제출했다"면서 "일본의 조치는 수출 통제를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성 장관은 "일본 정부가 시행령 개정에 나선 이유로 든 한국의 수출통제 제도 미흡, 양국간 신뢰관계 훼손 등은 모두 근거가 없다"며 "동북아 안보협력의 근간을 흔드는 매우 엄중한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정부의 의견서는 20쪽 분량으로 일본 경제산업성에 이메일로 송부됐다는 설명이다. 성 장관은 "일본 정부가 시행령 개정에 나선 이유로 든 한국의 수출통제 제도 미흡, 양국간 신뢰관계 훼손 등은 모두 근거가 없다"면서 "수출통제 강화조치는 즉시 철회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정우 청와대 부대변인은 한국 정부 의견서에 대해 "일본이 한국의 전략물자 관리 미흡을 주장한 것에 대한 부당성을 집중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면서 "일본의 조치가 큰 틀에서 세계무역기구(WTO) 정신과 협약에 위반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진행 중인 WTO 일반이사회 진행 상황에 대해서는 "1일차였던 23일 회의에서 안건들에 대한 논의가 장시간 진행됐다"며 "14개 안건 중에서 11번째인 일본 수출 규제와 관련해선 우리 시각으로 오늘 오후 논의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공격이 본궤도에 오르며 우려도 커지고 있다. 당장 미국 산업계의 우려에 시선이 집중된다.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24일 본인의 SNS를 통해 미국 산업계가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며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 정보기술산업협회(ITI), 전미제조업협회(NAM) 등에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가 글로벌 공급망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감안해 한일 양국이 조속히 이 문제를 해결하고 추가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을 촉구하는 공동명의의 서한을 저와 일본 세코 경산대신 앞으로 발송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유 본부장은 "이처럼 미국 업계도 일본 조치의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고 있는 만큼, 일본은 3개 품목에 대한 수출 통제를 원상 회복하고, 한국을 수출통제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개정안을 철회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국내 5개 경제단체는 이미 우려의 목소리를 낸 상황이다. 한국무역협회,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영자총협회, 중소기업중앙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등 국내 경제관련 5개 단체는 23일 "일본의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이 시행되면 양국 기업이 오랫동안 쌓아온 신뢰를 손상시킬 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무역 및 산업관계에 불확실성을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중 무역협상 눈길..."동북아 큰 그림 봐야"
한일 경제전쟁이 불을 뿜는 가운데 업계에서는 동북아시아 전반에서 벌어지고 있는 힘의 역학관계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먼저 살펴야 하는 것은 미중 무역협상이다. 두 수퍼파워는 G20을 기점으로 무역전쟁 휴전에 돌입했으나 최근까지 미국의 대만에 대한 무기판매 등으로 갈등을 빚은 바 있다. 그러나 미국이 중국 화웨이에 대한 제재 완화와, 중국이 미국의 농수산품 수입에 나설 뜻을 밝히며 포성이 잦아드는 분위기다. 미중 무역협상단도 조만간 만날 전망이다. CNBC는 24일 "두 나라의 협상팀이 중국에서 만날 것"이라면서 "26일부터 내달 1일까지 협상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미중 무역협상이 궤도에 올랐으나 아직은 '아슬아슬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중국에서의 협상 장소가 베이징이 아닌 상하이로 정해진 대목이 중요하다. 이는 협상 장소를 두고 두 나라가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뜻이다.

두 나라의 아슬아슬한 힘의 균형이 한일 경제전쟁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미국이 한일 경제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은 여전히 낮지만, 한일군사협정 파기 가능성 등 강대강 대치가 이어지는 가운데 미국이 중국과의 협상에 돌입하며 한국과 어떻게든 '거래'에 나설 수 있다는 의견에 제기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문제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동북아 패권 경쟁 측면에서 러시아의 역할론도 주목받고 있다. 일본이 한국에 3대 핵심 소재를 겨냥한 수출 규제에 들어간 직후 러시아는 불화수소를 한국에 공급할 수 있다는 의사를 타진한 바 있다. 최근 중국과의 합동훈련 중 러시아 TU-95 폭격기 및 A-50 조기경보통제기 등 군용기 5대가 동해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에 무단 진입했으며, 러시아가 이례적으로 "기기 오작동으로 계획되지 않은 지역에 진입했으며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빠른 유감을 표명한 점도 중요하다. 

한일 경제전쟁이 벌어지며 힘의 균형이 '이미 합의된' 미국과 일본의 뜻대로 흘러간다면 한국으로서는 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늘어날 수 있다는 의견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