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한일 경제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가운데 미국의 역할론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미국은 한일 두 나라의 경제전쟁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거듭 피력했으나, 최근 참의원 선거에서 '애매한 승리'를 거둔 아베 내각이 경제전쟁의 장기화 가능성을 열어둔데다 한국 정부도 강경대응을 이어가자 조금씩 분쟁에 관여하려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아베 내각 참의원 선거 절반의 승리...한일 갑론을박
아베 내각은 21일 진행된 참의원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과 공명당이 각각 57석과 14석을 차지해 총 71석을 확보, 비개선 의석까지 더하면 123석의 의석을 차지했으나 숙원이던 개헌 발의선 2/3는 확보하지 못했다. 전체 의석수로 보면 오히려 줄었다. 자위대 합헌화 등 개헌을 통해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려던 아베 총리의 구상에 제동이 걸린 셈이다.

일본이 4일부터 3대 반도체 소재의 한국 수출규제에 돌입한 가운데, 참의원 선거에서 아베 내각이 절반의 승리를 거두자 업계의 관심사는 '후속 플랜'에 집중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아베 내각이 참의원 선거에서 개헌 발의선을 확보할 경우 한국에 대한 제재를 일부 완화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오기는 했으나, 현 상황에서는 반대의 시나리오가 유력해지고 있다. 

실제로 아베 총리는 참의원 선거 결과가 나온 직후 임기 내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도 한일 경제전쟁에 대해서는 “한국이 먼저 답을 가져와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일제 강점기 시절 징용공 처우 등의 현안으로 한국과 정면충돌을 불사하는 한편 '당분간 제재는 이어질 것’이라는 메시지다. 숙원이던 개헌을 통해 내부 여론을 주도해야 하는 상황에서 당분간 한국에 대한 강공모드를 이어간다는 뜻이다.

추가 제재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아베 총리는 참의원 선거 후 한국에 대한 제재 확대를 시사했으며, 현 상황에서는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거나 약 800여개 수출 소재로 제재 규모를 확대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강경 대응을 이어갈 방침이다. 당장 문재인 대통령은 18일 여야 5당 대표와 회동해 일본의 수출규제에 공동 대응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의 제재를 보복으로 규정하는 한편 즉각 철회해야 한다는 공동 발표문까지 냈다.

22일에는 더 강경한 메시지도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보좌관 회의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가전, 전자, 반도체, 조선 등 많은 분야에서 일본의 절대 우위를 하나씩 극복하며 추월했다"면서 "우리는 (지금도 역경을) 이겨내고 이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 "자유무역 질서를 훼손하는 기술 패권이 국가 경제를 위협하는 상황에 있어서도 신기술의 혁신창업이 중요한 해법이 될 수 있다"면서 "기존 부품·소재 기업의 과감한 혁신을 더욱 촉진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른바 극일(克日) 의지를 강조하는 분위기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을 드러내는 등 강공모드로 일관하고 있다.

여야도 뭉쳤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여야 만장일치로 ‘일본 정부의 보복적 수출규제 조치 철회 촉구 결의안’이 채택된 가운데 외통위는 "대한민국 국회는 일본의 대한국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조치가 한일 우호관계의 근간을 훼손함은 물론 한일 양국 국민을 고통스럽게 하고, 전 세계 자유무역 질서를 퇴보시키는 조치라는 점에서 우려한다"고 말했다. 나아가 외통위는 "대한민국 국회는 일본 정부와 일부 정계 인사들의 대북제재 위반 의혹 등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비난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말했다.

당정도 머리를 맞댔다. 더불어민주당과 정부는 글로벌 경기 둔화, 미중 무역분쟁 장기화, 일본 수출규제 등에 따른 경제활력 회복과 혁신성장을 위해 2019년 세법 개정안에 각종 세제 지원 혜택을 담았다고 전격 발표했다. 특히 일본이 수출 규제 대상으로 지정한 반도체 부품·소재 분야에 대한 기업 지원과 연구개발 지원에 방점을 찍었다. 소재 부품 분야 52시간 근무제 유예 등 큰 틀에서의 충격대응방안이 나온 상태에서 당정이 적절한 액션플랜에 돌입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재갑 고용부 장관도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출입기자단과 간담회에서 "일본의 수출규제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우리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는 가용자원을 총동원해 대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세계무역기구(WTO)의 여론전도 본격화될 전망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23일(현지시간) 스위스에서 열리는 WTO 일반이사회에 김승호 신통상질서전략실장를 수석대표로 정경록 산업부 세계무역기구과장, 윤선영 홍보소통과장이 참여한 대표단을 급파했다. 일반적으로 WTO 회의에는 제네바 주재 대사가 참여했지만, 한일 경제전쟁이라는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 이번에는 고위급 당국자가 참석한다는 설명이다. 한국 대표단은 WTO 일반이사회에서 자유무역 원칙이 수출규제와 모순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한편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가 WTO 규범에 위배된다는 점을 강조할 전망이다. 추후 분쟁 절차에서 대외적인 명분을 쌓는 큰 그림이다.

통상교섭본부장을 지낸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이 최근 미국을 다녀온 가운데 유명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도 23일부터 27일까지 미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미국 역할론 '주목'
한일 경제전쟁이 강대강 대치로 고착화되는 가운데 미국의 역할론이 시선을 끌고있다.

미국은 한일 경제전쟁에 대해 지금까지 '개입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내세운 바 있다. 실리콘밸리의 타격이 예상되지만 내년 대선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에게 민주당을 지지하는 실리콘밸리는 정치적 라이벌에 불과하며, 미국 마이크론 등에 반사이익을 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중립'기조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미국을 방문한 김현종 2차장이 귀국하며 만난 기자들에게 "거시기하네요"라는 모호한 반응을 보인 것도 그 연장선이라는 평가다.

다만 분위기가 최근 변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일 한일 경제전쟁을 두고 "문재인 대통령이 나에게 관여를 요청했다"면서 "아마도 (한일 정상) 둘 다 원하면 관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처럼 한일 경제전쟁의 추이를 지켜보며 이에 개입할 생각은 없지만, 두 정상이 원한다면 개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행보에 집중할 필요도 있다. 볼턴 보좌관은 22일 일본을 방문해 도쿄 총리관저에서 야치 쇼타로  국가안보국장과, 오후에는 외무성에서 고노 다로 외무상과 각각 회담했으며 현지 언론은 볼턴 보좌관과 일본 정부가 "폭넓은 의제에서 생산적인 논의를 했다"고 보도했다. 업계에서는 일단 볼턴 보좌관이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선박들을 보호하기 위한 미국의 ‘동맹국 감시단’ 구상에 일본의 참여를 독려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이 자리에서 한일 경제전쟁도 큰 틀에서 논의됐을 가능성이 높다. 볼턴 보좌관은 23일 한국으로 넘어와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강경화 외교장관, 정경두 국방장관과 만날 예정이다.

▲ 반도체 코리아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 출처=삼성전자

한일 경제전쟁이 치열한 복마전으로 접어드는 상황에서 볼턴 보좌관이 연이어 일본과 한국을 방문하는 가운데, 미국의 유력 언론들이 일본을 비판하는 장면도 심상치않다. 뉴욕타임즈에 이어 블룸버그도 23일 사설을 통해 아베 내각을 겨냥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웃국 한국을 상대로 시작한 어리석은 무역전쟁에서 일본이 빠져나오도록 하는 것"이라고 일침을 날렸다. 블룸버그는 "일본 당국자들은 이번 조처가 첨단 부품의 불법적인 북한 유입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서 "보복임이 분명하다”고 규정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일 경제전쟁에 개입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상황에서 볼턴 보좌관이 일본과 한국을 방문하고, 미국 매체에서 경제전쟁에서 나선 일본을 비판하는 장면은 결국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미국의 의지라는 반응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일본 내외부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오고 있다. 오사나이 아쓰시 와세다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지난 18일 일본 경제 주간지 기고문을 통해 “일본은 신중했어야 한다”면서 “(일본의 제재는)중국 반도체 업계의 성장을 돕는 행위”라고 비판했으며, 대만 TSMC의 마크 류 공동 CEO는 지난 18일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제재는 가장 큰 불확실성”이라면서 “올해 4분기 전망을 내놓기도 어렵다”고 우려하는 등 불안감을 숨기지 않았다.

최근 미중 무역전쟁 휴전이 크게 흔들렸으나 양국의 농수산물 수출입 규제 완화로 한 고비를 넘긴 상태에서, 미국이 미중 무역전쟁으로 촉발된 동북아시아 힘의 균열을 수습하기 위해 한일 두 나라의 적극적인 중재 역할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