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때 한반 친구들이 반창회 워크샵이라는 명목 하에 1년에 한번씩 모여

1박2일을 지냅니다. 지방에 있는 친구의 전원 주택을 빌려 시끌 벅적하게

민폐를 끼치게 됩니다. 올해도 이십여 명 이상이 모여 거의 무박 2일을 보냈습니다.

다들 환갑 즈음이 되어서인지 눈에 띄게 말에 대한 반응들이 느려졌고,

술잔을 오래 붙들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습니다.

사십여 년 전 졸업 후 각지에 흩어져 살다가 몇 년 전부터 만난 친구도 있고,

몇몇은 줄곧 붙어 지낸 친구도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들 친소 정도는 약간씩 다르지만, 신기하게도 어릴 때 2년을 같이 지낸 사이라

그런지 ‘한번 ㅇㅇ은 영원한 ㅇㅇ’같이 끈끈하게 묶이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이틀 동안 친구들 모습을 이리 저리 겪다보니 그래도 재미있게 분류가 되었습니다.

이틀 행사를 위해 전날부터 와서 열심히, 묵묵히 일한 친구들이 있는 반면에,

일개미론을 설파하며 여전히 뺀질거리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옛날 그리 까불고, 건들거렸던 친구들은 거울 앞에 돌아온 누이처럼 얌전해져

있는가 하면, 예전 그리 착하고, 말 잘 듣던 친구는 술판을 이끌며 마구 달리고 있었습니다. 살아온 세월의 무게 탓일까요?

아님 속된 말로 한 인생에 ‘인생지랄총량의 법칙’이 작동하는 걸까요?

또 아직도 이런 모임을 자기 뜻대로 해보려는 열정(?)파가 있는가 하면,

돌아가며 한 마디씩 말하는 순서마저 자기 이름만 함께 불러 달라며

친구들에 고마움을 표하는 속 깊은 친구도 있었습니다.

나이 들며 더 놓지 말아야 할 자세로 배려, 참을성, 줏대를 얘기하던데, 이렇게 구분하고 보니

그래도 친구들이 한쪽씩은 걸치고 있어서 다행(?)이라 할까요?

그럼에도 모든 친구들이 이날 모임에서 가장 많이 쓴 영어 표현인 오케이,

와이낫(why not)처럼 다들 녹아들고,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퇴직했거나 퇴직을 앞두고 불안해하는 친구들에게

‘문 하나 닫히니 새로운 문이 열리는’ 경험이 있기를 서로 기원했습니다.

또 모임에 헌신적으로 일해 준 의리 있는 친구들에게 복 받을 거라며 오래 박수를 쳤습니다.

옛날 어려서도 착실했고, 나이든 지금도 과묵하며 빙그레 웃기만 하는 친구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참지 않아도 된다는 이상한 격려도 보냈습니다.

무박으로 이어지는 새벽, 목소리들이 잦아들 때쯤 숙소 근처인 강변을 산책했습니다.

달밤에 펼쳐진 모든 풀밭이 비현실적일 만큼 온통 허연 꽃밭으로 보였습니다.

우리가 머물던 데서 가까운 봉평이 무대였던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한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함께 한 친구들과의 앞날도 달밤 저 들판의 허연 꽃처럼 흑백 사진 같은 은은함으로

오래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함께 길을 걷는 마음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