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한일 경제전쟁의 포성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관리 규정 변경을 통해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를 비롯해 리지스트와 에칭가스 등 3개의 수출 규제에 돌입한 가운데 정부와 기업은 물량 확보는 물론 일본의 제재 부당성을 알리며 여론전에도 돌입하는 모양새다.

소재에서 중간재, 완제품으로 이어지는 밸류체인의 흐름에도 시선이 집중된다. 다만 정치적으로 한일 경제전쟁을 해석할 경우 이번 한일 경제전쟁이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 민주당을 지지하는 실리콘밸리 기업의 날개를 꺾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말도 나온다. 이런 해석이라면 밸류체인의 산업성과 국가 경제 타격에 대해 논하는 것은 의미가 사라지며, 확전이 불가피해진다.

대체 가능? 불가능?

일본의 경제제재가 시작된 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현지로 날아가 물량 확보 및 거래선 조율에 나섰으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는 평가다. 일본 금융계 인사들과 만나는 선에서 갈등 봉합의 단초만 마련했다는 뜻이다. 이 부회장이 귀국 후 휴일 사장단 회의를 열어 컨틴전시 플랜을 가동한 이유다.

다만 일본의 제재는 전면적인 금수조치가 아닌, 민간을 중심으로 공급을 조절해 시장을 장악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현재 일본이 제재에 나선 소재들이 큰 무리없이 수입되는 이유다. 그 연장선에서 아슬아슬한 공급선 확보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질 전망이다.

SK하이닉스도 움직이고 있다. SK하이닉스 대외협력총괄 김동섭 사장은 일본의 원자재 협력사 방문을 위해 16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했다. 현지 주요 협력사 경영진들과 만나 원자재 수급방안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일본의 제재가 시작된 핵심 소재의 비축분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다만 업계에서는 최대 3개월 수준의 비축분이 마련됐다는 말이 나온다. 민수용에 대해서는 수출 전면금지가 아닌 제재 수준인 상황에서, 화이트리스트 배제를 전제로 통관절차가 일반적으로 3개월이 걸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일본이 추가 제재에 돌입하는 한편 소재 수출 물량을 자의적으로 조절한다면 상황은 나빠질 수 있다.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플랜B를 위한 각 기업의 행보도 빨라지고 있다. 닛케이는 17일 삼성전자가 일본 외에서 불화수소를 수급받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과 중국, 대만에서 만들어진 제3국 기업의 불화수소 수급을 타진하는 셈이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제3국 기업은 중국의 방훠그룹(浜化集団)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 일본은 제3국에서 만들어진 자국 기업의 소재를 한국에 수출하는 것에 미온적이다. 이 부회장도 일본 출장 당시 이 부분을 공략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바 있다. 그러나 닛케이의 보도는 일본 기업이 아닌, 말 그대로 제3국의 물량이기 때문에 업계에서는 ‘혹시나’하는 기대감이 번지고 있다.

다만 제3국의 불화후소 물량을 확보해도 지금은 상용화는커녕 적정 테스트에 돌입하는 수준이라 만약 성공한다고 해도 단기간의 처방책은 요원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소재 수급은 일정 수준의 기술력과 순도를 보장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오랫동안 거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검증되지 않은 제3국의 소재를 빠르게 수급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라는 말이 나온다.

▲ SK하이닉스 대외협력총괄 김동섭 사장이 협력사와 원자재 수급 관련 협의를 위해 16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일본으로 출국하고 있다. 출처=SK하이닉스

여론전 심해진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은 한국과의 무역에서 약 24조4313억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미국과 홍콩에 이어 세 번째다. 미중 무역전쟁처럼 무역적자가 심해지자 제재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돈을 벌고 있음에도 제재에 나섰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번 제재가 철저히 정치적 관점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단기적으로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국내 지지층 결집을 이루려는 아베 내각의 노림수가 있다는 해석이다. 지금은 사실상 말 바꾸기 수준으로 철회됐으나 한 때 제재 이유로 한국의 대북제재 허술함이라는 프레임을 적용한 것도 동북아시아 외교관계의 판을 흔들겠다는 의지로 볼 수 있다.

한일 경제제재를 두고 경제적 관점에서의 대응은 물론, 정치권을 중심으로 여론전이 기승을 부리는 이유다.

한국 정부는 지금 강공모드다. 아베 총리가 “한국을 믿을 수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자 문재인 대통령은 15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우리 경제가 한 단계 높은 성장을 도모하는 시기에 경제 성장을 가로막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하며 "일본은 하루속히 외교적 해결을 위한 대화에 나서달라"고 촉구했다. 이어 일본의 조치를 두고 "상호의존과 상호공생으로 반세기간 축적해 온 한일 경제협력의 틀을 깨는 것이자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위한 한국 정부의 노력을 지지하며 동참하고 있는 국제 사회의 공동 노력에 대한 불신을 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면서 "일본의 의도가 거기 있다면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17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주재한 경제활력대책회의 모두발언에서 “일본이 수출통제 조치를 철회하고 협의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고 재차 경고장을 날렸다.

SNS를 통한 여론전도 치열하다. 세코 히로시게 일본 경제산업상이 문재인 대통령의 강경 발언을 트위터를 통해 비꼬자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16일 페이스북을 통해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 1일 대한국 수출 규제 조치 계획을 발표한 직후 강제징용 관련 양국 간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무역 관리에 대해서도 신뢰할 수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면서 “세코 경제산업상도 지난 3일 트위터에서 이번 조치에 대해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를 둘러싼 신뢰 관계 훼손을 배경으로 언급했다”고 지적했다.

세코 산업상이 한국의 대통령 발언을 비꼬며 외교적 결례를 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세코 산업상과 비슷한 지위의 성 장관이 “나와 이야기하자”며 상대의 격을 낮춘 전략이다. 한국 정부는 추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전문가 등 국제기구에 공정한 조사를 의뢰하자는 역공을 시도하며 WTO 등에서 여론전을 불사한다는 계획이다.

여론전의 핵심 중 하나인 미국의 태도도 눈길을 끈다. 한일 양국이 경제전쟁일 치르며 미국을 자기의 편으로 끌어오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는 가운데, 현재 미국은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미국이 일본의 한국에 대한 경제제재 사실을 사전에 인지하고 이를 묵인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경제제재에 돌입하며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 평화헌법을 개정해 “싸울 수 있는 군대”를 가질 경우 미국은 방위비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고, 나아가 막대한 물량의 무기를 판매할 수 있다. 워싱턴 정계에서는 한일 경제전쟁이 중국을 억누르는 효과도 있으며, 극단적으로 표현해 트럼트 미국 대통령의 정적으로 부상하고 있는 실리콘밸리 ICT 기업의 날개를 꺾는 ‘최적의 수’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