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한일 경제전쟁이 점입가경이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를 비롯해 리지스트와 에칭가스 등 3개의 수출 규제에 돌입한 가운데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한편 제재 범위를 넓히려는 시도에도 나서고 있다.

이 과정에서 치열한 여론전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은 초반 일제 강점기 징용공 문제를 통해 경제분야 공격에 나섰지만, 최근에는 한국의 대북제재 위반을 시사하는 등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벌였다. 그러나 북한에 전략물자를 수출한 가능성이 높은 나라는 한국보다 일본이라는 지적이 나오며 일본은 “안보 위협에 따른 수출 제재”라며 말을 바꾸고 있다.

초반 허둥대던 한국 정부는 강경 대응으로 돌아섰다. 문재인 대통령은 15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우리 경제가 한 단계 높은 성장을 도모하는 시기에 경제 성장을 가로막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하며 "일본은 하루속히 외교적 해결을 위한 대화에 나서달라"고 촉구했다.

일본의 경제제재를 두고 업계에서는 “3개월만 버티면 승산이 있다”는 조심스러운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일본이 제재에 나서며 한국 산업계의 소재 물량을 틀어쥔 상태로 인질극을 벌이고 있으나, 수출 전면 금지가 아닌 제재를 통한 국지전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들어오는 물량 자체가 완전히 막힌 것은 아닌 상태에서 일본 화이트리스트에 한국이 빠져도 통관 절차는 3개월이다. 길다면 긴 기간이지만 이 시기를 살려 반도체 분야에서는 재고를 털어내고 공급 다변화 ‘액션플랜’에 나서면 글로벌 전자 공급망 교란에 부담을 느끼는 미국의 참전까지 끌어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일본은 어떻게 소재강국이 됐을까?

한일 경제전쟁이 소재분야에서 치열하게 벌어지는 가운데, 일본이 한국의 급소를 찌를 수 있었던 비결에 시선이 집중된다. 여기에는 일본 특유의 모노츠쿠리 문화(일본의 장인문화)와 풀세트형 경제구조, 시장을 빠르게 선점한 블랙박스 전략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2013년 발행된 포스코경영연구소의 ‘일본은 어떻게 소재강국이 되었나’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발표된 지 수 년이 지난 보고서지만 현재의 한일 경제전쟁 상황에서 의미있는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박용삼 수석연구원은 한국의 반도체 및 주력 산업을 흔들고 있는 일본의 소재분야 경쟁력을 평가하며 “압도적”이라고 표현했다. 박 연구원은 “일본의 주요 산업 밸류체인의 하류부분(조립·가공)에서는 한국과 중국 등에 점차 밀리고 있지만, 상류부분(소재·부품)에서는 여전히 압도적 경쟁력 유지하고 있다”면서 “일본산 소재부품이 없으면 당장 전세계 전자산업이 멈춰서는 상황도 벌어진다”고 말했다.

실제로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일본의 점유율은 유의미한 존재감이 없으나 반도체 재료인 포토레지스터는 압도적인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 상류부분의 엄청난 점유율로 하류부분을 흔들 수 있는 이유다. 일본이 최초의 재료인 소재를 가지고 있고, 한국이 그 소재로 중간재를 만들면 미국이 중국에 하청을 주고 완성품을 만드는 글로벌 체인이 형성된 상태에서 상류부분의 일본이 모든 산업구조를 지배하는 셈이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이다.

대일무역 적자가 높은 근본적인 원인도 여기에 있다. 박 연구원은 “한국의 소재부품 무역수지는 매년 개선되고 있으나 일본에 대해서는 여전히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재부품을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하며 수출로 얻는 실질적인 이익 대부분을 일본에 빼앗기는 소위 가마우지 경제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다.

▲ 일본 소재왕국 비결 세가지. 출처=갈무리

“일본이 어떻게 지금의 위치에 올라섰을까?”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박 연구원은 사회문화, 경제구조, 기업전략 측면에서 분석하며 사회문화 측면에는 일본식 장인정신을 뜻하는 모노츠쿠리를 거론했다. 모노츠쿠리는 '모노(もの)'와 만들기를 뜻하는 '츠쿠리(造り)'가 합성된 단어며 후지모토 다카히로 동경대 대학원 교수가 처음 사용한 표현이다. 혼신의 힘을 쏟아 최고의 물건을 만든다는 뜻이다.

일본의 장인정신인 모노츠쿠리는 소재분야와 찰떡궁합이다. 소재 개발은 공정 노하우나 경험을 체화(體化)한 숙련공이 얼마나 많은 가에 따라 시장에서의 성패가 좌우되는 분야며, 이 지점에서 일본 특유의 모노츠쿠리가 빛을 발한다는 분석이다.

소재산업의 아날로그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 오랫동안 숙련된 ‘장인’이 인내를 갖고 시행착오까지 감내하며 ‘예술품’을 만드는 모노츠쿠리가 현재 일본 소재산업의 압도적인 글로벌 시장 점유율로 귀결됐다는 설명이다.

경제구조 측면에서는 자국내 풀세트형(full-set) 경제구조가 소재강국 일본의 근간이라는 해석이다. 박 연구원은 “일본 특유의 계열 구조상 밸류체인의 각 단계들이 장기적이면서 안정적인 상호의존 관계를 만든 것이 중요하다”면서 “일본의 히타치화성이 이차전지 음극재 분야의 선두업체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수요업체인 산요(Sanyo)와의 기술개발 협력 및 구매확약 체결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개발된 소재가 실제 판매로 이어지며 사전에 부품, 완제품 조립업 체와의 긴밀한 커뮤니케이션과 세부 공정에서의 미세조정이 이뤄진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자국내 소재부품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산학연 공동 연구개발의 전통이 확립된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기업전략 측면에서는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간파한 것’이 꼽힌다. 박 연구원은 “한국 등 후발국들에게 완제품 가공조립 부문을 추월당하기 시작하면서 일본 기업들은 최종 제품의 심장에 해당하는 소재부품 분야로 자연스럽게 먼저 진출, 시장을 선점했다”면서 “수요처들이 특정 소재를 채택하게 되면 나중에 거래처를 바꾸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일단 시장을 확보하면 독점적 구조로 갈 수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블랙박스, 즉 인력 및 기술 유출을 철저히 통제하며 노하우를 내부에 축적한 전략도 주효했다. 박 연구원은 “일본 기업은 주요 소재의 경우 원칙적으로 해외 합작을 배제하고 있으며, 자사 내에서도 소수정예 인력만 핵심기술에 접근 허용하고 있다”면서 “역설계(Reverse engineering)가 불가능하도록 핵심 원재료의 배합, 처리공정을 블랙박스화함으로써 기술적 진입장벽이 구축됐다”고 말했다. 군사독재시절 한국 기업이 일본인 기술자를 한국으로 데려와 ‘달빛관광’을 지원하며 기술을 배우거나, 한국 기업인들이 일본 공장을 방문해 각자 외운 것들을 모아 역설계를 통한 설계도면을 완성하는 일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셈이다.

우리는 어떻게?

일본은 압도적인 소재분야 점유율을 바탕으로 반도체와 같은 중간재 수출국인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 LG디스플레이가 패널을 소독하는 화학약품을 일본에서 제공받지 않으면, 아예 패널 자체를 생산할 수 없는 ‘묘한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현재 일본은 무수히 많은 소재분야 장악력을 바탕으로 핵심소재에 대한 수출규제에 나서지 않아도 간접적인 피해는 얼마든지 입힐 수 있는 ‘꽃놀이패’를 쥐고 있다.

이와 관련해 다양한 전략이 나오고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한국도 소재분야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에 이견은 없다. 다만 단기간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해도 갑자기 일본 수준의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는 주장은 판타지에 가깝다. 그런 이유로 여론전 및 정치외교적 유연한 대응과 같은 단기적 방안과, 소재분야를 건강하게 키우는 장기적 방안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전자는 일본을 상대로 하는 것이며, 후자는 우리 스스로의 체질개선이다.

우리 스스로의 체질개선을 위해서는 세 가지 방안이 고려되고 있다. 먼저 규제 완화다.

지난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긴급 경제인 초청 간담회에서 일부 경제인들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 규제 완화를 제안했다. 화평법이 화학물질에 대한 강력한 규제를 전제하며 국내 소재개발 산업 발전에 발목을 잡고 있다는 주장이다. 2012년 경북 구미공단의 불산 누출 사고를 계기로 개정된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도 현실성이 없는 규제를 통해 국내 소재개발 경쟁력을 저해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환경을 이유로 묶어둔 규제로 국내 소재 경쟁력이 성장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라면서 “정부가 한일 경제전쟁에서 큰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이번 기회에 현실성이 없는 규제라도 일부 해소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다만 화평법과 화관법이 국내 소재개발 사업의 발목을 잡았다는 주장에는 이견이 있다. 화평법의 경우 업체들이 공동등록을 통해 비용을 줄일 수 있는 길을 만들었으며 기간도 유연하다는 반론도 있다. 화관법도 유연하게 현실에 적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환경부는 화평법과 화관법이 국내 소재개발 사업의 발목을 잡았다는 지적이 나오자 “화평법과 화관법은 화학물질로부터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로, 관계부처 및 업계, 시민사회 등 사회적 합의를 거쳐 제개정됐다”면서 “2015년에 법령 제정 이후에 화평법에 따라 5490종의 물질이 등록되고, 3만 5000건이 연구개발용으로 등록면제확인을 받았으며 화관법에 따라 2015년 이후에 많은 업종에서 공장 신·증설 등 영업허가를 취득한 사업장이 증가하고 있으며, 화학사고 발생은 줄고 있는 등 국내 기업은 제도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신중한 접근을 통해 상황에 맞는 유연한 대응이 필요하다.

두 번째로는 내부 밸류체인 조성이다. 박 연구원은 “소재사업의 리스크와 불확실성을 줄이고 하류부문과의 정보비대칭성 해소를 위해 잠재적 수요업체와의 긴밀한 협조가 필수적”이라면서 “소재 개발 단계부터 수요기업이 공동으로 투자, 혹은 기술협력을 진행하 고 개발된 소재에 대해서는 해당 수요기업에 우선적 공급권을 주는 ‘수요기업 지향형’ 분업시스템 도입이 필요하다”고 봤다. 일본의 전략을 채용한 셈이다. 나아가 국내 대학, 연구기관, 벤처들과의 장기적 파트너십을 키우고 인력 확보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최단기간 기술 추격을 위한 연구개발에 나서야 한다는 뜻이며 이러한 흐름이 일본 모노츠쿠리와는 또 다른 한국의 장인정신과 만나야 한다는 설명이다.

마지막은 정부의 역할이다. 소재자립을 위한 정부 차원의 지원책이 필요하다. 박 연구원은 국산 핵심소재 의무사용량 쿼터제 등 국내 소재산업 기반 강화를 위한 정부 지원책에 주목했다. 그는 “기술간 컨버전스를 위해서는 이종 기술들을 매끄럽게 연결시킬 수 있는 소재기술 확보가 열쇠”라면서 “핵심소재에 대한 연구개발비 지원과 정부 차원의 판로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