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책 읽기에만 골몰해 생활고에 시달리던 장자(莊子)가 마침내 길을 나섰다. 자신의 친구이자 위나라 군주인 감하후에게 양식을 빌리러 가기 위해서다. 장자의 어려운 형편을 들은 감하후는 돈 빌려주기가 썩 내키지 않아 핑계삼아 “얼마 후 세금이 걷히면 삼백금을 빌려주겠다”며 말을 돌렸다. 이에 화가 난 장자는 우화를 들려주며 감하후에게 일침을 놓는다.

“오는 길에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속에서 파닥거리는 붕어 한 마리를 보았네. 그 붕어가 나를 부르며 ‘지금 내 신세가 다급하니 한 됫박의 물이라도 부어 달라’라고 하더군. 그래서 내가 ‘지금 내가 서강으로 가는 길인데, 조금만 더 기다리면 서강의 강물을 끌어다 주겠다’라고 했다네. 그러자 붕어는 화를 벌컥 내며 ‘지금 당장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인데, 나중에 강물을 끌어다주겠다니 훗날 건어물 전에서나 나를 찾아보시구려’라며 나를 나무라더군”.

장자 외물편에 나오는 학철부어(涸轍鮒魚)에 관한 얘기다.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속의 붕어’라는 뜻으로 지금 당장 방법을 찾지 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를 수밖에 없는 곤궁한 상황을 말한다.

지난 10일 문재인 대통령은 ‘30대 그룹 총수 간담회’를 열어 최근 일본의 수출규제로 불거진 한일 간의 경제전쟁에 대한 담화를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정부가 최대한 뒷받침할 테니 대외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주요 기업 간의 공동 기술개발, 대기업·중소기업 간 부품기술 국산화 협력 확대 등을 통해 한국 경제가 한층 업그레이드되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으라’는 당부를 하였다. 물론 대통령이 지적한 내용은 타당하다. 이번에 일본 경제산업상이 수출제한을 결정한 반도체, 디스플레이의 핵심 소재인 플로오린 폴리이미드, 리지스트, 에칭가스는 일본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약 70~90%로 비단 이번 한일 경제전쟁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이들 소재산업에 대한 국산화 작업은 분명 국내 반도체, 디스플레이 산업의 경쟁력 강화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발언이 현 시점에서 적절하냐는 것이다. 같은 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신동빈 롯데 회장이 대통령과의 간담회에 불참하고 서둘러 일본 금융, 경제계의 주요 인사들과 비밀 회동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현재 한일 경제전쟁 속 한국기업, 더 나아가 한국경제가 처한 현실이 얼마나 절박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학철부어’ 고사 속 붕어처럼 지금 당장 한국경제에 필요한 것은 지난 수 십 년 동안 목표로 삼아왔으나 아직 이루지 못한 부품·소재 산업의 국산화가 아니라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경제·통상·외교 라인의 물밑 작업인 것이다. 한일 경제전쟁에 대한 귀책사유가 한일 양국 어디에 있든 정부는 ‘치킨게임’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한일 갈등 속에서 단 몇 개월이라도 한국경제의 숨통을 틔워줄 협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미중 무역전쟁 당시 양국 정상들이 명분을 앞세운 치열한 주도권 싸움 속에서도 적절한 간격을 둔 ‘휴전’으로 실리를 챙기며 자국의 기업들을 도왔던 것처럼 이번 한일 경제전쟁에서도 명분과 실리를 모두 살릴 수 있는 완급조절이 필요한 것이다. ‘서강’의 큰물을 기다리다 한국경제가 ‘어물전’에서 발견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