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일본의 한국에 대한 소재 분야 수출 규제로 촉발된 한일 경제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초반 일본의 강공에 수세로 몰렸던 한국이 적극적인 뒤집기를 시도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은 물론 러시아까지 전격적으로 개입하면서 일종의 파워게임 양상으로 흐르는 분위기까지 감지되고 있다. 그러나 사태가 복잡하게 얽히고 있는 만큼 신중하고 유연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일본의 경제제재에 따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도 눈길을 끈다.

일본의 선제공격, 한국의 대대적 반격
일본은 한국에 대한 수출관리 규정 변경을 통해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를 비롯해 리지스트와 에칭가스 등 3개의 수출 규제에 돌입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모두 반도체 및 가전에 들어가는 핵심 소재다. 일본은 심지어 추가 제재 가능성도 열어뒀다. 수출 규제 품목을 늘리는 한편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에서 배제하는 방향도 고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일 두 나라는 정식수교한 이래 수출입에 있어 항상 일본이 흑자, 한국은 적자를 면하지 못한 바 있다. 한국무역협회(KITA)와 관세청의 수출입통계에 따르면 1965년부터 2018년까지 54년간 한국의 대일 무역적자 누적액은 총 6046억 달러에 달한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한국에 경제제재를 가한다는 것은 일반 경제논리로 이해할 수 없다는 말도 나왔다. 정치의 문제에서 시작된 논란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경제제재는 초반 일제 강점기 시절 징용공 처우 문제에서 비화됐으나, 최근에는 북한제재 위반 논란까지 확산됐다. 일본 후지뉴스네트워크는 10일 한국 정부 문건을 입수했다며 2015년부터 지난 3월까지 한국에서 총 156건의 전략물자밀수사건이 벌어졌다고 보도했다. 이는 일본의 소재분야 경제제재의 중요한 이론적 배경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에 앞서 일본 자민당의 오노데라 이쓰노리(小野寺五典) 안보조사회장은 후지뉴스네트워크가 공개한 한국 정부의 문건을 기사로 쓴 조선일보 기사를 인용, 한국 정부의 전략물자관리에 의문을 보이기도 했다.

사태가 확산되자 국내의 반일감정도 극에 달했다. 아이와 관련된 제품과 서비스에 있어 '메이드 인 재팬'을 걷어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그 불똥이 일본 작가 원작인 '엉덩이 탐정'과 같은 문화 콘텐츠에도 튀는 분위기가 감지됐다. 한국중소상인자영업자총연합회는 5일 일본 제품 판매를 중단할 것이라 발표했으며, 온라인에서는 소니와 니콘, 유니클로 등 일본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이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다.

▲ 일본상품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출처=갈무리

일본의 강공모드가 이어졌으나 한국은 초반 적절한 대응에 나서지 못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주재한 대외경제장관회의 모두발언에서 일본의 경제제재에 대해 “즉각 철회되어야 한다"고 주문하는 한편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의 소위 롱 리스트 발언이 이어졌으나 사태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이 나왔다. 일각에서는 국내 소재 분야의 허약함이 만천하에 드러났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정부와 기업인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기도 했다.

반전은 12일부터 시작됐다. 초반 갈팡질팡을 거듭하던 한국 정부가 강경대응이라는 기조를 세우며 뒤집기 가능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당장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12일 대북제재 위반 혐의에 대해 한일 양국 모두 국제기구의 공동조사를 받자고 제의했다. 일본이 대북제제 위반 가능성까지 운운하며 비정상적인 논리를 펼치자 "공동으로 검증하자"는 역제안을 내놓은 셈이다.

이어진 돌발상황도 한국의 행보에 힘을 실어줬다. 국회 국방위 소속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일본 안전보장무역정보센터(CISTEC) 자료를 바탕으로 일본에서 1996년부터 2013년까지 총 30건이 넘는 대북 밀수출 사건이 벌어졌다고 폭로했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경제제재에 돌입하며 대북제재 위반 가능성을 시사한 가운데 오히려 "일본이 잘못했다"는 역공을 한 셈이다. 보수정당 정치인이 국익을 위해 문재인 정부를 도와 소위 좌우합작에 나서는 장면은 그 자체로 의미가 크다는 평가다.

러시아가 에칭가스를 한국 기업에 공급할 수 있다는 깜짝제안도 들어왔다. 국내 산업계에서는 현실성을 두고 의문을 가지고 있으나, 최소한 일본의 경제제재에 대항할 수 있는 카드가 하나 더 추가됐다는 의미가 있다.

대미 외교전략도 가동되고 있다. 미국에 급파된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은 한미일 3자 고위급 협의를 추진하고 있으며 미국이 일본보다 한국에 힘을 실어줄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일본의 경제제재가 이어지면 한국의 반도체 제작이 멈추고, 이는 완제품을 만들어야 하는 미국 기업에 악재기 때문이다. 미중 무역전쟁이 간신히 휴전된 상황에서 미국이 일본의 경제제재를 좌시할 이유가 없다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심지어 한일 경제전쟁이 장기화되면 중국이 어부지리를 얻을 가능성도 제기되기 때문에, 미국이 향후 어떤 방식으로든 사태에 개입할 가능성은 높다는 것이 중론이다. 미중 무역전쟁의 추억이 아직도 생생한 중국은 일본을 맹비난하는 중이다.

업계에서는 한국이 반격의 실마리를 잡았으나 방심은 금물이라는 평가다. 나아가 각 국의 개입이 시작되며 한국이 강대국들이 모인 파워게임장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불안감도 나오고 있다.

▲ 삼성전자 화성 반도체 라인이 보인다. 출처=삼성전자

국내 산업계 '위기탈출'...이재용 부회장 행보 의미는?
13일 업계 등에 따르면 현재 일본의 제재로 국내 경제계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 나온다. 국내 메모리 업계 관계자는 “불화크립톤, 불화아르곤 등은 지금 정상적으로 수급되는 것으로 안다”면서 “국내 메모리 경쟁력이 휘청이는 수준은 아니다”고 말했다. 일본이 생각보다 강공모드에 돌입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에 앞서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즈는 10일 일부 관료의 발언을 인용해 “일본 정부가 민수용 반도체 소재에 대해서는 수출규제를 철회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전략물자와 가까운 소재는 엄격하게 수출하되 민수용 소재에 대해서는 규제철회 가능성을 열어둔 셈이다. 물론 일본이 EUV 분야에서 제재를 가동하는 것은 사실로 밝혀졌으나, 이를 두고 국내 시스템 반도체 로드맵을 견제하는 것이냐는 주장에는 호불호가 갈린다.

국내 산업계는 사태 추이를 지켜보며 발 빠른 행보를 거듭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일본으로 날아가 현지 상황을 점검하고 12일 귀국했다. 일각에서는 현지 소재 분야 파트너들과 만날 것으로 예상했으나, 이 부회장은 금융권 인사들과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재 분야에 심각한 피해가 감지되지 않는 상태에서 현지 파트너들과의 스킨십을 시도하는 한편 금융 측면의 확전 자제를 위해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서는 일본의 경제제재가 이 부회장에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다'는 반응도 나온다. 불확실성에 노출되는 것은 당연히 부정적이지만 현재 이 부회장을 둘러싼 논란에는 해법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최근까지 내부적으로 '위기'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외부에 내놓던 점이 중요하다. 실제로 삼성전자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6월에만 1일, 13일 두 차례 DS부문 경영진과 회동했다. 삼성전자의 시스템 반도체 전략인 삼성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한 후 투자 집행 계획을 직접 챙기는 한편 최근 경기둔화 우려에 따른 반도체 사업의 리스크 대응 체계를 재점검했다는 후문이다. 삼성 반도체 비전 2030은 지난 4월 발표됐으며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 133조원을 투자해 시장 1위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어려운 상태에서 위기론을 인지하고 새로운 동력을 찾자는 각오다.

6월 14일에는 더 생생한 메시지가 나왔다. 고동진 IM부문장 사장, 노희찬 경영지원실장 사장, 노태문 무선사업부 개발실장 사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이 부회장은 “지금은 어느 기업도 10년 뒤를 장담할 수 없다”며 “그 동안의 성과를 수성(守城)하는 차원을 넘어 새롭게 창업한다는 각오로 도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흔들리고 있는 IM부문의 경쟁력을 다잡는 한편 5G 이후의 6G 이동통신, 블록체인, 인공지능 전략을 구상하면서 그 기저에 강력한 위기론을 전제한 셈이다.

글로벌 경영환경 변화, 메모리 반도체 수퍼 사이클 종료 등 실질적인 위기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당연한 대책이라는 평가가 나오지만, 일각에서는 지나치게 위기론을 지피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분식회계 등의 이유로 수사 당국의 칼 날이 그룹 수뇌부를 향하는 상황에서 삼성전자는 이 부회장이 존재해야 정상경영이 가능하다는 점을 알리려는 포석도 깔려있다는 말이 나온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사태가 심각해지며 그룹 수뇌부를 향한 수사 당국의 압박에 대비해 정상경영 의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최근 정부가 소위 적폐청산이라는 대의명분을 바탕으로 전열을 정비하는 장면도 눈길을 끈다.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의 검찰총장 후보자 낙점,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의 청와대 정책실장‘행’이 이뤄지는 점이 중요하다.

특히 윤 지검장은 지금까지 서울중앙지검을 지휘하며 국정원 특수활동비, 사법농단 등 적폐청산 수사 등 전 정권에 대한 수사를 이어갔으나, 이를 제외하면 대부분 기업 수사에 방점을 찍은 바 있다. 청문회를 끝낸 그가 검찰총장에 오르면 기업을 대상으로 한 수사가 많아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특히 특수통 검사들이 대거 중용되면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고조될 전망이다. 대법원 국정농단 판결을 앞 둔 이 부회장에게는 불리한 일이다. 최근에는 이 부회장 승계를 위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비율을 조작한 정황 등도 폭로되며 이 부회장의 고민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경제제재가 시작되자 이 부회장은 문 대통령이 주재한 30대 그룹 총수 간담회에 참석하지 않는 선에서 일본의 불만을 잠재웠고, 현지로 날아가 다양한 해법을 모색했다. 일본의 경제제재는 삼성전자의 위기며, 이는 이 부회장이 직접 나서야 풀 수 있다는 확실한 메시지다.

결론적으로 삼성전자는 끊임없이 위기론을 지피며 이 부회장 중심의 일치단결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해왔고, 일본의 경제제재는 이 부회장의 행보에 강력한 당위성을 심어주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이 부회장을 둘러싼 수사의 칼날이 여전한 상황에서 "위기의 삼성전자에는 이 부회장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순간이다. 이 부회장 승계 과정을 조사하고 있는 검찰이 지난 5일부터 김태한 삼성바이오로직스 대표를 잇달아 불러 수사에 속도를 내는 상황에서, 일본의 경제제재가 터지자 이 부회장 소환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한편 구광모 LG그룹 회장도 움직이고 있다. 11일 경기도 평택에 위치한 LG전자 소재생산기술원을 방문해 홍순국 LG전자 소재생산기술원장 등과 회의를 열어 상황을 점검했다. LG는 일본의 경제제재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지 않는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LG디스플레이는 업의 특성상 제재의 사정범위에 들어와 있어 유연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평가다.

최태원 SK 회장은 다소 여유롭다. SK하이닉스가 일본 경제제재의 직접적인 사정권에 들어왔으나 특유의 밸류체인 전략이 빛을 발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SK머티리얼즈가 대표적이다. 2015년 SK에 인수된 SK머티리얼즈는 반도체 소재 회사를 연이어 인수하며 밸류체인, 즉 수직계열화 로드맵의 중심에서 활동했다는 평가다. 배터리 측면에서 리스크는 있으나 현 상황에서 최 회장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보인다. 국내 자동차 부품 국산화율 95%의 발판에서 활동하는 정의선 현대자동차 수석 부회장도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