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한일 경제전쟁의 총성이 울렸다. G20 정상회담을 통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미중 무역전쟁의 극적인 휴전을 끌어내며 국내 경제계는 가슴을 쓸어 내렸으나 일본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악재를 만났다는 평가다. 일각에서는 지나치게 일본에 의존하고 있는 기초 소재 분야의 인프라를 강화시킬 절호의 기회라는 말도 나온다.

G20 공동선언 잉크도 마르기 전에...

G20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반대로 각 국 정상들은 공동선언에 반 보호 무역주의 표현을 넣지 못했으나, 자유무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문구는 포함시켰다. 그러나 G20 의장국인 일본은 공동선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한국을 겨냥, 자유무역에 역행하는 경제제재에 돌입해 논란이 되고 있다.

일본 경제사업성은 1일 한국에 대한 수출관리 규정 변경을 통해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를 비롯해 리지스트와 에칭가스 등 3개의 수출 규제에 돌입한다고 발표했다. 극우성향의 산케이 신문이 지난달 30일 비슷한 내용을 보도한 후 우려가 커진 가운데, 일본 정부가 기어이 칼을 빼든 셈이다. 일본이 외국환관리법상의 우대제도인 화이트(백색) 국가 대상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방안도 불사하며 사실상 한국에 대한 경제 압박에 나섰다는 평가다.

기습적인 경제제재지만 일각에서는 ‘예고된 일’이라는 평가가 중론이다.

최근 한일관계는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특히 일제 강점기 시절 징용 노동자 현안을 두고 첨예하게 맞서는 중이다. 한국 대법원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판 결을 내리고 지난 1월 15일 신일철주금에 대한 압류 자산 매각 절차에 착수한다는 방침을 발표하자 일본 정부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G20 정상회담 중 한일 정상회담은 불발됐으며,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선 상태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그쳤다.

두 나라는 한 때 해상에서 레이더 조준 문제로 으르렁거리기도 했다. 이러한 한일관계 악화가 경제제재로 이어진 셈이다.

최근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도 불협화음이 이어졌다. 

비록 협의가 불발됐으나 올해 초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베트남 하노이 정상회담을 열고, G20이 끝난 후 트럼프 대통령이 DMZ로 넘어가 김 위원장과 깜짝 만남을 가지는 등 최근 한반도는 물론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대형 이벤트가 많이 열린 바 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소외되는 분위기다. 아베 일본 총리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 사건을 두고 김 위원장과 직접 만나겠다고 선언하는 등 한반도 문제에 의욕적으로 참여하려고 했으나 “일제 강점기 시절 사죄가 우선”이라는 북한의 반대에 직면해 논의 자체를 확장시키지 못하고 있다. G20 의장국으로 활동했으나 예상보다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하고 미국 등 강대국의 논의에만 매몰됐다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이런 비판속에서 7월 참의원 선거를 치러야 하는 아베 총리 내각이 악화된 한일관계를 통해 경제제재라는 카드를 바탕으로 날 선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확전 불가피”

정부는 일본의 제재를 두고 세계무역기구(WTO) 협정 위반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징용 피해자 등을 대상으로 벌어진 두 나라의 충돌로 경제 제재 카드를 꺼내든 것은 WTO 협정 위반의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1일 오전 홍남기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 주재로 녹실간담회가 열린 가운데 정부는 일본의 사전협의가 없는 조치를 강력히 규탄하는 한편 필요할 경우 선제적인 대응에 나설 것이라 밝혔다.

일본이 G20 정상회담 의장국으로 활동하며 반 보호 무역주의 표현을 공동선언에 담지는 못했으나, 자유무역에 대한 노력과 관련된 표현이 있다는 점을 적극 부각시켜 일종의 국제 여론전에도 나설 가능성도 제기된다.

미중 무역전쟁 휴전에 돌입한 중국도 일본을 비판하고 있다. 중국 환구시보는 1일 “일본도 미국에서 배워 무역 제재 놀이를 하고 있다면서 ”한국의 징용 배상 문제를 보복하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일본은 적반하장이다. 아베 총리는 2일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에 대한 경제제재를 설명하며 “한국과의 신뢰가 손상됐기 때문에 조치를 취한 것”이라면서 “WTO 규칙에 맞다. 자유무역과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반쪽 IT 전자왕국? 대응 필요하다

일본의 제재는 치명적이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TV와 스마트폰 등 디스플레이 부품으로 사용되는 일반적인 부품이며 리지스트와 에칭가스는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품목이기 때문이다. 미중 무역전쟁이 극적인 휴전으로 접어들며 불확실성이 일부 제거되나 싶었지만, 일본의 제재로 국내 기업들의 한 숨은 더 커지고 있다.

최근 수출전선에 경고등이 들어온 상태라 더욱 뼈 아프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6월 국내 수출액은 441억8000만달러롤 기록해 전년 대비 13.5% 감소했다. 7개월 연속 하락세다. 산업부는 미중 무역전쟁 및 글로벌 경제 위축이 국내 수출액 감소에 영향을 미쳤다고 밝히며 일평균 수출액도 20억5500만달러에 그쳤다고 발표했다. 전기차와 이차전지 수출 등은 호조세를 보였지만 반도체 수출액이 전년 대비 무려 33.2%나 하락했다. 그 연장선에서 일본이 리지스트와 에칭가스 수출 제한에 돌입하면 삼성전자 및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직격탄을 맞을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유연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온다. 먼저 일본의 제재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이 눈길을 끈다. 유진투자증권의 이승우 연구원은 “미중 무역전쟁이 간신히 봉합된 상태에서 일본이 나서 판을 깨는 일은 부담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패펀틀리 애플은 지난달 30일 일본의 경제제재가 한국은 물론 미국 기업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 전망했다. 특히 애플의 경우 삼성과 LG로부터 부품을 공급받고 있기 때문에, 일본이 경제제재를 통해 한국 기업을 압박하면 궁극적으로 애플도 피해를 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제재로 삼성전자가 첨단재료 수급에 어려움을 겪어 애플에 장비를 제공하지 못하면, 궁극적으로 완제품을 출시해야 하는 애플도 타격을 받는다는 논리다. 국내 수출지형이 중간재 수출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고, 모든 서플라이 체인이 연결되어 있기에 가능한 주장이다.

KB증권은 “한국은 WTO 제소를 통한 의견 수렴 과정도 전개할 것으로 보여 시장에서 우려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제한적으로 판단된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전화위복의 가능성도 제기된다. KB증권은 “이번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는 지금까지 해외 의존도가 컸던 한국 IT 소재의 국산화를 가속화시키는 계기와 전환점이 될 전망”이라면서 “잠재적 위험을 인지하고 있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삼성디스플레이, 삼성SDI 등은 2020년부터 반도체, OLED 및 전기차 분야에서 적용되는 핵심 소재 일부를 2020년부터 국산화를 시작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SK머터리얼즈, 한솔케미칼 등 IT 핵심 소재 개발과 상업 생산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몇 개의 업체를 중심으로 호재가 예상된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일본의 소재 경쟁력에 의존하던 체질을 바꾸고, 단순 중간재 수출 이상의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