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 후 미중 무역전쟁 휴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깜짝만남 등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대형 이벤트들이 속속 진행된 상태에서 일본이 한국에 기습적인 경제 제재 카드를 빼들어 눈길을 끈다.

미중 무역전쟁의 극적인 휴전으로 안도의 한 숨을 내쉬던 국내 경제계 입장에서는 심각한 사태다. 다만 일각에서는 일본의 경제적 도발이 장기간 이어지기에는 구조적인 어려움이 크며, 이 과정에서 두 나라가 타협점을 찾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일본의 기습제재

일본 경제사업성은 1일 한국에 대한 수출관리 규정 변경을 통해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를 비롯해 리지스트와 에칭가스 등 3개의 수출 규제를 7월 4일부터 단행한다고 발표했다. 지난달 30일 일본 산케이 신문이 ‘한국에 대한 경제 제재가 있을 것’이라고 보도한 내용과 동일하다. 일본이 외국환관리법상의 우대제도인 화이트(백색) 국가 대상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방안을 통해 사실상 한국에 대한 경제 압박에 나섰다는 평가다.

일본의 경제 제재는 악화된 한일관계와 관련이 있다.

한국 대법원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판 결을내리고 지난 1월 15일 신일철주금에 대한 압류 자산 매각 절차에 착수한다는 방침을 발표하자 일본 정부는 강력하게 항의한 바 있다. 나아가 한일 두 나라의 해군 레이다 논란까지 벌어지며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지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 과정에서 한국을 ‘신뢰할 수 없는 상대’로 규정하고 경제 압박 카드를 선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최근 폐막한 G20에서도 전조는 있었다. 한일 정상회담이 끝내 불발되는 한편,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고노 외무상이 잠깐의 대화만 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아베 일본 총리는 문재인 대통령과 잠시 악수를 하는 선에서 만남을 마무리했고, 각 나라의 외교수장들은 ‘선 상태에서’ 대화만 나누는 것에 그쳤다. 악화된 두 나라의 관계를 보여주는 명확한 장면이다.

국내 경제계 ‘좌불안석’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G20이 종료된 후 지난달 30일 담판을 통해 미중 무역전쟁의 휴전을 선언했다.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는 비판이 나오지만 최소한 두 나라가 적대적 관세보복을 중단하기로 결정한 점은 고무적이라는 평가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 주석과의 담판이 종료된 후 기자회견에서 화웨이 압박 수위를 낮추는 방안까지 제시했다.

지난해 G20 당시 미중 정상이 무역전쟁 휴전에 돌입했으나 이내 멍완저우 화웨이 부회장 체포 사건으로 재차 전쟁에 돌입한 사례를 돌아보면, 이번 휴전도 아직 완전한 평화는 아니라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경제는 물론 정치 및 외교, 국방 등 다양한 영역에 거쳐 벌어지던 분쟁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것은 국내 경제계에도 다행이라는 분석이다.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수퍼 사이클이 종료된 상태에서 전열을 추스릴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은 벌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일본의 경제 제재다. 일본이 경제 제재를 선택하며 국내 경제의 급소인 기본 소재를 겨냥한 것이 문제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TV와 스마트폰 등 디스플레이 부품으로 사용되는 일반적인 부품이며 리지스트와 에칭가스는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품목이기 때문이다.

최근 수출전선에 경고등이 들어온 상태라 더욱 뼈 아프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6월 국내 수출액은 441억8000만달러롤 기록해 전년 대비 13.5% 감소했다. 7개월 연속 하락세다. 산업부는 미중 무역전쟁 및 글로벌 경제 위축이 국내 수출액 감소에 영향을 미쳤다고 밝히며 일평균 수출액도 20억5500만달러에 그쳤다고 발표했다.

전기차와 이차전지 수출 등은 호조세를 보였지만 반도체 수출액이 전년 대비 무려 33.2%나 하락했다. 그 연장선에서 일본이 리지스트와 에칭가스 수출 제한에 돌입하면 삼성전자 및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직격탄을 맞을 수 밖에 없는 구조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와 리지스트는 글로벌 전체 생산량의 90%를 일본이 책임지고 있으며 에칭가스는 약 70%의 판매량을 일본이 점유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희토류만큼 강력한 전략 무기화가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 협정 위반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징용 피해자 등을 대상으로 벌어진 두 나라의 충돌로 경제 제재 카드를 꺼내든 것은 WTO 협정 위반의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1일 오전 홍남기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 주재로 녹실간담회가 열린 가운데 정부는 일본의 사전협의가 없는 조치를 강력히 규탄하는 한편 필요할 경우 선제적인 대응에 나설 것이라 밝혔다.

일본이 G20 정상회담 의장국으로 활동하며 반 보호 무역주의 표현을 공동선언에 담지는 못했으나, 자유무역에 대한 노력과 관련된 표현이 있다는 점을 적극 부각시켜 일종의 국제 여론전에도 나설 가능성도 제기된다.

모든 것은 연결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중 무역전쟁 기간 홍콩 시위 및 대만 국가 인정 등 전장의 범위를 경제 외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시킨 바 있다. 화웨이에 대한 제재도 국가 안보 위협의 측면에서 논의의 개념을 넓혔다. 단순한 경제는 물론 정치 및 사회, 외교, 국방 등 다양한 영역의 논란을 ‘글로벌 패권’의 측면에서 풀어내려는 시도다.

일본의 경제제재도 일제 강점기 시절 역사인식과 관련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최근의 경제 전쟁도 결국 정치 및 사회, 역사 등 다방면에 거쳐 접점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 경제제재의 부당성을 적극 알리는 한편 교섭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유연함을 보여줘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일본의 경제제재가 시작되며 국내 경제계의 피해가 예상되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그 후폭풍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주장도 나온다. 일본의 조치가 한국은 물론 미국 등 다른 우방국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패펀틀리 애플은 지난달 30일 일본의 경제제재가 한국은 물론 미국 기업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 전망했다. 특히 애플의 경우 삼성과 LG로부터 부품을 공급받고 있기 때문에, 일본이 경제제재를 통해 한국 기업을 압박하면 궁극적으로 애플도 피해를 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제재로 삼성전자가 첨단재료 수급에 어려움을 겪어 애플에 장비를 제공하지 못하면, 궁극적으로 완제품을 출시해야 하는 애플도 타격을 받는다는 논리다. 국내 수출지형이 중간재 수출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고, 모든 서플라이 체인이 연결되어 있기에 가능한 주장이다.

미중 무역전쟁이 간신히 휴전에 돌입한 상태에서 일본이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악재를 고집할 이유도 없다는 주장이 나온다. 나아가 국내 기업이 재고를 자연스럽게 소진할 수 있는 기회만 준다는 말도 나온다. 유진투자증권의 이승우 연구원은 “미중 무역전쟁이 간신히 봉합된 상태에서 일본이 나서 판을 깨는 일은 부담스러울 것”이라면서 “가뜩이나 재고 부담이 큰 국내 메모리 업체들은 자연스럽게 감산 결정을 할 가능성이 높아, 반도체 사이클 바닥 시점을 앞당기는 효과도 있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