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지웅 기자]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왔던 희귀의약품 시장의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 그동안 대부분의 제약회사들은 적은 환자 수로 인해 수익성이 낮고 치료제 개발이 어렵다는 이유로 희귀의약품 개발을 꺼려왔다. 그러나 최근 미국 식품의약국(FDA) 등 세계 규제기관들이 희귀의약품 개발을 장려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개발 여건이 한층 개선되고 있다.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도 점차 희귀질환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하고 희귀의약품 개발에 적극 뛰어들고 있다.

희귀의약품은 이름 그대로 희귀질환 환자에게 사용되는 의약품이다. 현재 희귀질환에 대한 정의는 국가마다 상이하다. 미국은 환자 수 20만명 이하, 유럽은 인구 1만명당 5명 이하의 질병을 희귀질환이라고 칭한다. 국내의 경우 환자 수가 2만명 이하로 적절한 치료방법과 치료약품이 개발되지 않은 질환을 일컫는다.

▲국가별 희귀의약품 지정 기준의 환자수 규모 비교. 출처=OECD Factbook, 한국보건산업진흥원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적으로 7천여종의 희귀질환이 등록됐으며, 매년 250개 이상의 새로운 희귀질환이 의학저널을 통해 보고되고 있다. 전체 희귀질환 환자 수는 적지 않지만 개별 희귀질환별로 환자 수를 살펴보면 매우 적은 편이다. 이 같은 질환의 희소성은 제약사들이 희귀의약품 개발을 망설이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제약사 입장에서 희귀질환을 대상으로 임상시험 자체가 어렵고, 연구·개발비를 고려해 환자당 치료비용을 높게 책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희귀질환은 원인규명이 어렵고 유병률이 낮아 치료제 개발이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희귀의약품 시장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미 FDA를 비롯해 전 세계 규제기관들이 희귀의약품 개발을 장려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미국은 1983년 희귀의약품을 개발하는 제약기업에 판매 독점권을 포함한 여러 혜택을 부여하는 '희귀의약품법'을 발표했다. 이후 1993년 일본과 2000년 유럽 연합에서 유사 법안을 통과시키며 희귀의약품 개발에 불을 지폈다. 한국도 2015년 ‘희귀질환관리법’을 발효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지난 12일 발표한 '국내외 희귀의약품 시장 및 연구개발 현황 분석'에 따르면 1983년 희귀의약품법 발효 이후 미국 FDA는 개발단계부터 파이프라인들을 심사하고 희귀의약품을 지정해 여러 혜택을 부여하고 있다. 이로 인해 최근 10년 동안 희귀의약품 수는 큰 폭으로 증가했다. 2016년 미국에서 지정된 희귀의약품은 333개다. 10년 전 143개보다 무려 132.8% 늘어났다. 지금까지 미국에서 희귀의약품으로 지정된 약물 수는 3976개에 달한다. 미국보다 한발 늦게 제도를 도입한 유럽은 1824개의 후보물질을 희귀의약품으로 지정하며 격차를 좁히고 있다.

▲2017년 한국 희귀의약품 생산실적. 출처=식품의약품안전처,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업계 전문가들은 앞으로 더 많은 의약품들이 희귀의약품으로 지정될 것으로 전망했다. 최근 FDA가 희귀의약품 지정 신청을 접수일을 기준으로 업무 일수 90일 이내에 처리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시장조사 전문기관인 이밸류에이트 파마(Evaluate Pharma)에 따르면 전 세계 희귀의약품 시장은 2017년 매출액 기준으로 약 1250억달러 규모로 성장했다. 이밸루레이션 파마는 2024년까지 희귀의약품 시장이 연평균 11.3%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약 2620억달러 규모를 형성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전 세계 처방약 매출액의 25% 차지한다.

한국도 희귀의약품 시장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국내에서 희귀의약품 생산규모는 2013년 216억원에서 2017년 595억원으로 급증했다. 여전히 수입 의존도가 높다는 점은 옥의티다. 2017년 희귀의약품에 대한 수입은 1932억원으로 지속적으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같은해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허가를 받은 18종의 희귀의약품도 모두 수입의약품이었다.

▲2017년 한국 희귀의약품 생산실적. 출처=식품의약품안전처, 한국보건산업진흥원

하지만 샤이어, 사노피, 젠자임 등 한국에 진출한 희귀질환 전문 글로벌 제약기업들과 경쟁하는 국내 제약사들도 점차 늘고 있다. 현재 식약처로부터 개발단계 희귀의약품 목록에 등록된 의약품은 22개이다. 이중 19개가 한국 기업에 의해 개발되고 있다. 특히 GC녹십자의 희귀질환 치료제인 '헌터라제'는 기존 수입의약품을 대체하며 빠르게 경쟁력을 확대하고 있다. 저렴한 가격으로 희귀질환 환자들의 치료 비용을 낮추고, 건강보험 재정 부담을 완화하는 효과를 가져오면서 국내 희귀의약품 시장의 본보기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 관계자는 "현재 국내 제약사들이 개발 중인 희귀의약품은 약물 93개, 임상 프로젝트 106개 정도로 파악된다"며 "글로벌 동향과 유사하게 항암 분야와 바이오의약품의 연구개발이 활발하다"고 평가했다.

이어 "글로벌 희귀의약품 시장은 개발과정부터 정책적 혜택과 높은 약가, 독점권 등 경제적 이점으로 인해 전체 제약산업의 성장률보다 훨씬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며 "신속허가 과정을 기한 내에 조속히 처리하겠다는 FDA 의지로 인해 이러한 추세는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