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법학자 로스코 파운드(Roscoe Pound, 1870-1964)는 '법은 안정적이어야 하나, 결코 정지하고 있어서는 안된다.(Law must be stable, and yet it can't stand still.)'라고 했다. 그의 말을 대변하듯 오늘날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를 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가 신속하게 정착되어 기존의 질서인 양 되어버린다. 이에 따른 사회적 상황의 인식과 그러한 변화의 물결에 늘 관심을 갖고 이를 전향적으로 내지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법이며 법원일 것이다.

이러한 막중한 임무를 처리하는 법원이 예술을 품었다. 법원과 예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두 카테고리가 만났다. 대한민국 국방부에 설치된 고등군사법원(高等軍事法院)은 ‘그림이 있는 군사법원’이라는 캐치프레이즈(슬로건) 아래 2015년부터 미술작품을 법정에 전시해왔다. 일반인에게는 엄숙하고 무겁게만 느껴지는 법원을 미술과 법률이 만나는 색다른 장으로 만든 것이다.

그 처음은 군대 훈련 도중 지뢰를 밟아 젊은 나이에 한 쪽 눈과 한 쪽 다리를 잃었지만, 절망하지 않고 묵묵히 화가의 길을 걸어온 장창익(JANG Chang-ik, b.1957) 작가와 함께 했다. 그 당시 반응은 뜨거웠다. 한 사례로 같은 해인 2015년 7월에 서울서부지방법원(ㅡ西部地方法院)은 소송관계인, 시민, 법원 가족들 등 법원 관계자들이 미술작품을 감상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서부공간’을 별도로 마련하는 등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현재까지도 서울서부지방법원은 법원 본관 3,4층 복도를 갤러리화하여 전시공간을 확보하기 어려운 작가 및 작가 지망생들에게 무료로 작품 전시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제12회 《조귀옥: 내안의 야생화》 고등군사법원 내 대법정 전시 전경. ⓒ고등군사법원, 최고운 큐레이터

기존에 창원지방법원(昌原地方法院)이나 부산지방법원(釜山地方法院) 등 민간 법원에서 미술작품을 설치한 바는 있으나, 작가의 전시회를 개최한 것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다. 모든 군사법원의 2심 재판을 담당하며 군사법원의 대표 역할을 하는 고등군사법원에서 이러한 시도를 한 것은 여러 가지로 큰 의미가 있다. 군사법원은 군인 등의 형사사건만을 재판하기 때문에, 법원에 오는 사람은 사건의 피고인이거나 그 가족, 또는 범죄 피해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있는 이들에게 미술작품으로 에너지 충전과 내면의 위안을 삼는 계기를 제공하기 위함이 전시회 개최로 이어진 것이다.

제12회 《조귀옥: 내안의 야생화》 고등군사법원 내 소법정 전시 전경. ⓒ고등군사법원, 최고운 큐레이터

대부분 사람들은 미술품 감상에 있어 그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술사적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미술사 전공자들조차도 마음에 드는 작품 앞에서는, 마치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난 것처럼 멈춰버리게 된다. 이때는 어느 시대이니 사조니 공부했던 지식들이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저 작품 세계와 나의 세계가 맞닿아질 때 일어나는 감정을 느끼는 것에 빠지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미술품은 감성의 공유와 소통의 매개체이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따뜻한 체온을 불어넣어 마음을 가라앚히는 강력한 요소로 작용된다.

제12회 《조귀옥: 내안의 야생화》 고등군사법원 내 복도 전시 전경. ⓒ고등군사법원, 최고운 큐레이터

미술계에 종사하고 있는 필자의 시각에서 더 놀라웠던 것은 여느 미술기관들처럼 실질적인 후원으로 작가가 장기적으로 창작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고 있음이었다. 먼저 오프닝 행사를 주최하여 법조계 관계자들을 초대해 네트워크를 제공했다. 그리고 전시 홍보물(엽서, 카탈로그 등) 제작해주어 전시가 끝난 후에도 작가의 자료로서 포트폴리오 역할을 가능케했다. 마지막으로 언론 보도를 통해 전시 홍보에까지 힘쓰고 있다. 전시 기간도 넉넉히 두어 달 동안 진행되기 때문에 꾀 오랫동안 노출되는 셈이다.

제12회 《조귀옥: 내안의 야생화》 고등군사법원 내 오프닝 전경. (사진=고등군사법원 제공) ⓒ고등군사법원

다른 부수적 효과도 있다. 우선 대형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가지 않아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미술품을 즐길 수 있는 문화예술 향유자가 되었다. 법원 내 로비나 복도, 쉼터 등 곳곳에 형형색색 미술작품이 설치되면서 국직부대 장병 및 군무원, 근무원들에게 색다른 환경을 제공했다. 무채색의 밋밋했던 법원에 생기와 활력이 더해진 것이다. 한결 밝고 부드러운 느낌을 자아내면서 편안함과 생동감이 있는 열린 고등군사법원으로 거듭났다.

제12회 《조귀옥: 내안의 야생화》 고등군사법원 내 쉼터 전시 전경. ⓒ고등군사법원, 최고운 큐레이터

이런 활동은 사실 어떠한 직접적인 수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어쩌면 근무원들에게는 번거로운 업무 하나가 더 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기적 관점으로 볼 때, 대한민국 법원이 갖는 딱딱한 이미지 인식에서 벗어나 예술을 사랑하고 후원하는 이미지가 우위에 서게 된다. 국민이 부여한 헌법적 사명을 갖고 국민과 소통하며 다가가기 쉬운 친숙함으로 법원의 문턱을 낮추는 선순환 구조가 될 것이다. 그럴 것으로 기대한다. 국가의 문화예술 발전에 있어서 다양한 순수예술 분야를 후원하고 향유자와 창작자를 연결 짓는 훌륭한 매개체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예술가들이 마음껏 창작활동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문화예술을 후원하는 여러 사례들이 모여 저변이 확대되고 기반이 마련될 때 건강한 문화생태계가 조성될 수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제12회 《조귀옥: 내안의 야생화》 고등군사법원 내 로비 전시 전경. ⓒ고등군사법원, 최고운 큐레이터

◾ 최고운 학고재 큐레이터